
♧ 사랑의 꿈 – 성숙옥
눈과 눈이 빛으로 부딪힌다
화르르 가슴에
꽃 핀
순간이 영원만 같았다
허나 그 어떤 절정도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구심력은 원심력에 힘을 잃어간다
등근 보름달이 그믐달 되듯
끊어질 듯 이어가는 빛 사이
못다 한 말들은 등 돌린 침묵에 묻힌다
가다 보니 산이다
길이 하나인 산을 넘어야 여럿인 들길이 있다지민
차마 가지 못하고 결국 제 자리
잠시 달렸던 붉은 꽃
그것 때문에
살아선 놓지 못한다
그 작은 씨방,
깨지 않는 사랑의 꿈을

♧ 강을 따라 걷다보면 – 백수인
강물 따라 걷다 보면
그대 흐르는 소리, 그 의미를 알 것만 같네
어느 언저리 지나갈 때 연인의 목소리로 속삭이는지
따뜻한 그 소리 어떻게 모두의 마음을 녹이는지
그대 어느 골목길을 흘러갈 때 휘파람을 부는지
어느 때 그 기분 좋은 얼굴로 반짝이는지 알 것만 같네
눈보라 몰아치고 강변의 나무들이 울부짖을 때
그대 뜨거운 울음 보탠다는 것도 알 것만 같네
흐르다가 또 흐르다가 어느 정자 밑을 돌아들 때
왜 깊은 마음 다독이며 고요히 침잠하는지
그대가 낭떠러지를 만나 비명을 지를 때
하늘빛이 어떻게 어두워지는지
알 것만 같네

♧ 손자가 처음 서는 날 – 배한조
내 품에 안겨
세상에 온 날이 아직 선하다.
손 하나 들 때마다
발을 옮기려 몸을 흔들 때마다
나는
매번 처음을 본다.
책 속 그림을 보며
염소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의자 끝을 붙잡고 일어서며
바닥이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배운다.
“엄마”
그 짧은 소리가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불러야 할 말이라는 것을
너는 아직 모른다.
몸을 옮기는 법을 익히는 동안
계절은 다시 봄을 꺼내 놓고
하루하루가
새로 시작되는 연습이다.
나는 안다.
걷는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떠받치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의 이 작은 걸음이
머지않아
긴 삶의 나루에 닿을 것이리라.

♧ 눈물겹네 – 박부민
제 자리를 지키는 것
계속 펄럭이는 것
바람 속에서
아름답고 눈물겹네
제 자리를 이어 가는 것
끝까지 서 있는 것
빗발 속에서
향기롭고 눈물겹네
꽃이 그렇고 나무가 그렇고
산과 길과 강이
삶이 사람이
그대가 눈물겹네
제 자리를 붙드는 것
계속 살아가는 것
비바람 속에서
아름답고 향기롭네
그대가 참으로 눈물겹네

♧ 빙벽 앞에서 – 김미외
빙벽을 바라보며
따스한 햇살에 녹아 내리고 싶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언제나 네 그림자에 숨어
내 안의 슬픔도 빙벽으로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각진 빙벽의 결을 바라보며
결이 아름답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어제처럼 오늘도 저 결에 찔려
적요의 그늘을 덮고 잠든 채 눈 감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빙벽을 바라보며
위대한 영혼의 결정체라고 네가 말했을 때
너는 만지면 만질수록 쩍쩍 달라붙는
화사의 아린 결정체라고 말하고 싶었다
결코 네가 내게 울음도 절망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냥 사랑으로 뒤척이는 너와 나
우리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묻고 싶었을 뿐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45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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