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변의 길손
홀로 배회하는 저녁 해변
몸도 마음도 노을에 물들었다
석성처럼 잗다랗게 다듬은
한담동* 해변 길
다문다문 펼쳐진
모래사장에 남실대는
쪽빛 바닷물너울들 저음의 향연
어렸을 적부터
이 길에 담긴 애틋한 추억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황혼넠
나의 연륜도 이 시간에 와있다
아련한 옛 기억들이
황혼넠 노을로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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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동 : 제주시 애월리 해변마을

♧ 여름날의 동심
정자나무의 무성한 그늘이
열정적 애무로 나를 감싼다.
참매미들 절창이 더위 꽉 찬
마을 밖 저편으로
무늬 지듯 깔리고.
휘감긴 연륜 바람찬 돛처럼 펼쳐지는
실루엣의 그림 같은 옛 기억들
생각하면 그때가 어제인 듯
지금도 꿈꾸듯
정자나무 아래서
펼쳐보는 아련한 그 여름날의 동심.

♧ 9월을 보내며
남향받이 유리창을 넘어온
노란 햇살이 방바닥에 보실 거리고
서편 들창을 넘 이온 갈바람이
책상 위 책갈피 사이로 스민다.
여름내 절창을 뽐내던 매미들도
제 갈 길로 간 지금
깊어져 가는 밤 고요히 흐르는
창 밖 가을 생명들 소리
두꺼운 초록의 여름은 어제의
추억이 되고
낯설지 않은 갈바람이 마음속
심오深奧한 계절의 서정을 일깨운다

♧ 가을날의 명상
마당의 고욤나무가 낙엽을 떨구는
마지막 남은 가을의 한 조각
휘두르는 연륜의 바퀴
그간 푸르기만 했던
내 어깨 위로도 가을이 지나쳐감에
지난 계절의 기억들은
철 지난 과거사가 되고
그동안 살면서 다져온 삶의
못다한 미련
낙엽처럼 다 내려놓고
관망의 세상을 살라지만
황혼을 바라보는 가슴 빈 터엔
아직도 남아도는 파릇한 연민.

♧ 해바라기의 미소
느슨한 초가을 햇살이 여기저기
싫지 않게 깔리고
여름의 된 햇살 속 지내온 시간을
씨방에 품고 샛노란 꽃잎 하늘대며
갈바람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뜨거운 납량의 찬란했던 계절도
서서히 북녘으로 가고 있는 즈음
그러나 아직도 녹색은 푸르거니
그리움에 마음 설레거든
갈바람에 옷깃 열어젖혀
너의 둥그런 미소로 가을을 맞이하자.
*김창화 제5시집 『섬의 아우성』 (춘강출판,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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