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백나무 아래서 - 박동남
편백나무 숲속
나무 사이로 내리는 햇살
이는 바람에
빛과 그림자가 통나무집 커튼에 드리워 바람에 술렁인다
새들이 쉼을 얻는 낮 시간
향기로운 치유의 밀실에 든다
나무를 휘감고 노래하는 초록에
모든 것이 유순해진다
비가 오는 날은
난타와 탭 댄스로
벌레와 짐승들을 정결하게 씻어 준다
눈이 즐겁다
감동이 가슴에 채워진다
누구나 망설이지 말고 오세요
새 힘이 솟아나는 이곳으로

♧ 붉은 낙인 – 목경희
두꺼운 암막 사이 새어든 울음
서로의 눈짓마저 가로막는다
가닿지 못해 고립된 섬들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던 기다림 끝에
짓이겨진 감정의 물줄기
소리 없이 계곡을 지난다
빛과 어둠, 그 아득하고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진저리나던 미움의 끝단에
그리움의 선홍 피가 맺히고
동백꽃 고개 꺾이듯, 툭 떨어진다

♧ 입동과 소설 사이 - 남대희
햇쌀 하기 엔 너무 부드러웠고
해살 해보고 오므렸다
튕겨 나오는 것들은 모두 끝이 있어
스미지 못하고
카페1098
곁에 느티나무 붉게 흔들렸고
전봇대가 창문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는 오후에
하늘이 머리를 꾹 눌러 주저앉히고
바람이 나뭇잎을 따라다니며 웅성거리는 때였고
창공이 창공 너머까지 통과하는
압화 같은 구름 조각 사이
새의 머리가 화살같이 박히는
그런 날들 걸어 두는,

♧ 별못 – 나병춘
누가
저 텅 빈 허공에
금못 은못을 챙, 챙, 챙
박아 두었을까
까만 하늘
무너지지 말라고
지금도 챙, 채앵, 못 박는 소리
나의 외로운 귓가에 쏟아지나니
별자리 못들이 흘린
핏방울 땀방울 눈물방울
적막한 호수에 쏟아져서
수련 왜개연 청개구리로 뛰어노나니
누가
저 가난하고 연푸른 못에
금못 은못을 박아 두었을까
노랗고 하얀 별들의 눈동자로

♧ 스트레스 – 김정옥
머릿속에서 콩 타작하는 소리가 난다
귀에서 벌레들까지 합창하며 야단법석이다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봐도 물러나지 않는다
악다구니에 참지 못하겠다고 심장이 맹렬하게 막아선다
투석전으로 열불이 끓는다
가라고 등 떠밀어도 갈 생각하지 않던 밤이
슬며시 뒷걸음질 치고
박새가 창문을 두드리며
수양 매화 향기로운 뜰에서 부른다

♧ 난초 – 김동헌
군자가 글을 읽는다
맹자 고자장상 11장
仁人心也章(인지심야장)에 나오는
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학문지도무타구기방심이기이)
나는 20대에 안진경체로 쓴 적이 있다
학문의 도를 고민하며 표구해서
거실에 걸어 두었다
몇 해 전 최화백이 전해 준 군자란
학문지도를 깨우쳤다
만 오 년 만에 꽃을 피웠다

♧ 가난은 어디에 필요한가 – 김미외
거침없이 새날이 왔는데
떠오르는 해 속에
가난이 뼈마디를 빛살로 발라낸다
웅크리던 구석을 나와 돌아온 샛길이
허허벌판에 눕는다
가난은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다
절벽에 매달린 돌덩이로 굴러떨어져
희망으로 부푸는 근육질을 납작하게 깨부순다
내 안의 다정한 종소리와 오기는 녹슬어 가고
생의 명암은 더욱 검은빛으로 짙어진다
가난은 왜 나를 사랑하는가
어디에 쓰겠다고 나를 이렇게 꽉 끌어안나
세찬 바람에도 부리가 뽑히면 안 된다는
하찮지 않은 위로를 알려 주기 위함인가
삶이란 끝까지 가봐도 영롱한 고통임을
서늘한 명랑임을 알려 주기 위함인가
나를 사랑한 가난이 있었다는
어금니 깨물던 이야기를
오래된 농담으로 웃는 그 날 향해
부서진 햇살 물고
슬픔의 너른 그늘을 걷는다
*시 :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 제455호)에서
*사진 : 아이리스 자포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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