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향문학' 2023년 하반기의 시(1)
[문인초대석]
♧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 뒷집 - 문태준
사람 없는 뒷집
빈 마당은
고요가 나던 곳
오늘은 눈발 흩날려
흰 털 새끼 고양이
다섯이
뛰는 듯
움직이는
희색(喜色)
그러나
고요를 못 이겨
눈발이 멎다
♧ 눈부신 정오 – 이명혜
유명식당 대기표 받고 기다리는 동안
청춘이 다 갔나 보다
먹고 사는 일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되묻고 돌아보고
회한으로 주저앉은 자리
생명 우듬지 더듬이로 돋아
다시 불쑥 돋는 식욕
봄날 대기표 받았다
십이 번 손님 들어오세요
반가워 화들짝 손들었는데
하이얀 미음 한 그릇
저승길 안내하고 있더란다
♧ 서울 – 유자효
서울로 서울로 몰려오던 행렬 따라
나 역시 서울로 와 살아온 지 반백 년
이제는 내 뼈를 묻을
몸의 고향 되었네
♧ 화왕산 억새 – 정현숙
대지에 반짝이는 도포자락 걸쳐 입고
자신을 비운 채 비바람 햇살 함께
화왕산 도인이 되어 나를 불러 세웠다
한낮엔 은빛으로 휘달리던 파도였네
지는 해 황금색 입혀 절정이며 성불이던
가을의 전설이었네, 극락정토 꿈꾸며
*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 2023 하반기(통권 제2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