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문학' 2023 겨울호의 시(2)

김창집1 2024. 1. 10. 00:05

 

 

꽃을 촬영하는 법 김병택

 

 

세상사에 공명할 때 비로소

세상사를 남길 마음이 생겼다

 

꽃을 촬영할 때 필요한 것도

꽃의 생애에 공명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을 똑같이

대하는 일은 맹목이었다

어떤 꽃에는 특별한 시선을

다른 꽃에는 평범한 시선을 보냈다

 

줌업으로, 접근해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술은 쓸모가 없었다

꽃은 오로지 꽃 자체로 존재했다

 

꽃을 화려하게 만드는 노력이

성공한 예를 찾기는 어려웠다

꽃은 꽃의 자태만을 드러냈다

 

꽃 촬영은 촬영의 의도가

멀리 사라질 때에 완성되었다

 

 

 

 

능소화 김성주

 

 

비명인 듯 울음소리인 듯

 

엇박자의 삶들이 비틀거리는 골목 어귀

술 취한 아비가 어김없이 태풍을 몰고 왔다

출렁거리는 밤 속으로 사라지는 저놈

 

창을 움켜쥐고 박차를 가했다

아비의 심장을 노려

하늘로 돌진하는 능소(凌宵)의 말 울음소리 말밥굽 소리

 

대장장이 능소가 떠났다

 

쭈그려 앉아 모루에 올려진

구부러진 허리, 연골이 닳아버린 무릎, 비틀린 손가락

땅땅 챙챙 두들길 때마다 퍼런 멍이 자꾸만 붉게 부풀어 터졌다

 

여기 능소라는 대장장이가 있었다

꽃받침째 떨어져 흩어진 능소의 일기를 품고

능소야! 능소야!

젖은 어미가 쓰러져 있다

 

 

 

 

하논 마루 김순선

 

 

움푹 파인 원형경기장 안에서

여름 내내 하늘 바라보며

키를 키우고 뙤약볕과 씨름하며 심지를 굳힌

벼들은 베어졌다

 

병풍을 두른 듯

바람도 비껴가는 포근한 옛길

논둑길 따라 논물이 재잘대는 아늑한 곳에

까까머리 이병 같은

벼 빈자리마다 파르스름하게 싹이 올라

상큼하다

 

추수가 끝난 하논 마르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에

흘러가는 구름 한 토막 뚝 잘라놓고

가을을 끓이고 있다

 

큼지막한 하논 대접에

가을 한 국자 퍼 담아서

지나가는 길손에게

베지근한 가을을 건네고 있다

 

 

 

 

은밀히 김원욱

 

 

은밀히

위험이 동네로 왔습니다

난 지금 위험합니다

은밀한 위험이 위험하다 말합니다

빗소리 속에서 위험이 외칩니다 후둑둑, 후둑둑,

물러서라 외칩니다

난리라고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뒤뜰에 동백나무를 심었습니다

시퍼렇게 눈뜬 이파리만 바라보다

가슴앓이조차 은밀히,

은밀히 돌아가셨습니다

자꾸만 은밀히

위험 속으로 갑니다 빗방울이 후둑둑,

위험하다 외치는데

어쩌다 은밀한 동네, 지금

나는 위험합니다

 

 

 

 

창작의 근원 김항신

 

 

영에서 영으로 간다

그것은 무에서 유로 다시 무의식 속

나만의 행로

 

혹자는 그것 또한 운, 이라고 한다

 

그럼 나는 이게 운명

근접하지 못하는 무, 에 근원

그러기에 멍, 이라는 곳에서 놀아보자

바쁘게

 

 

 

           *제주작가회의 간나 제주작가2023 겨울호(통권 8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