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서안나 시집 '애월'의 시(1)

김창집1 2024. 1. 14. 00:02

 

 

시인의 말

 

 

   시집을 엮으며 비루한 문장들을 쓰고 지우며 나는 많이 아팠다. 시집 제목을 애월이라 붙이고, 고향을 시집에 들인 죄로 나는 제주의 바다와 바람과 돌 속을, 그 전생 같은 시간을 한없이 떠돌았다.

 

 

 

 

제주국제공항 388

 

 

죽음을 밟지 않고 제주에 착륙할 수 없다

 

제주국제공항 비행장은

43 때 최대 학살터

2007388구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역사의 평탄화 작업이 끝난 제주공항

학살의 무늬를 따라 달려가는 활주로

주검이 먼저 이륙한다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제주를 떠날 수 없다

 

---

* 1950819일과 20일 이틀간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되었다.

 

 

 

 

재의 풍경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워야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얼굴이 흐려질 동안

두 눈에 담았던 풍경이

재가 될 동안

 

입술에 감추었던 약속과 고백과

지상의 영광과 모욕이

애월 봄볕이

진언이 될 동안

 

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등으로

봄 햇살을 할퀴며

표범처럼 울었다

 

 

*한그루 '달력'에서

 

 

봇디창옷*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끓게도 하지만

봇디창옷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 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옷를 입힌 마음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내 눈에도 뾰족하니 돋습니다

 

---

*봇디창옷 : 귀한 아기에게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삼베로 만들어 입힌 어미의 마음. 어미는 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고 기다리지.

**콥데사니 : 제주에선 콥데사니를 제사 음식에 쓰지 않지. 콥데사니라고 부르면 제주의 제삿날이 마늘처럼 매워지네.

***심방 : 신을 모시는 심방들이 징게징게 굿하는 날 신도들이 준비한 제물 든 차롱을 굿당에 나란히 올린다. 억울하게 죽은 저싱 사름을 위해.

****물애기 : 물애기라고 부르면 나도 물렁거리는 진흙덩어리가 되네.

 

 

 

 

나쁜 기적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처럼

 

누가

꽃 속에

비련을 풀어두었나

 

벌레가 잎사귀를 다 먹었다

아버지의 폐 숨소리처럼

 

아버지도 그랬다

아침이 되면

나팔꽃처럼

벌떡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벌레가

잎사귀를 먹는 동안

꽃은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는

어떤 눈길로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몸을 바라보았을까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보랏빛 핏줄 선 손등으로

두드리는

나팔꽃

 

아프다는 건 절벽 같은 것

 

나팔꽃 지는 저녁은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것

 

 

             *서안나 시집 애월(여우난골, 시인수첩시인선 079,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