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나 시집 '애월'의 시(1)
♧ 시인의 말
시집을 엮으며 비루한 문장들을 쓰고 지우며 나는 많이 아팠다. 시집 제목을 애월이라 붙이고, 고향을 시집에 들인 죄로 나는 제주의 바다와 바람과 돌 속을, 그 전생 같은 시간을 한없이 떠돌았다.
♧ 제주국제공항 388
죽음을 밟지 않고 제주에 착륙할 수 없다
제주국제공항 비행장은
4․3 때 최대 학살터
2007년 388구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역사의 평탄화 작업이 끝난 제주공항
학살의 무늬를 따라 달려가는 활주로
주검이 먼저 이륙한다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제주를 떠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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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8월 19일과 20일 이틀간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되었다.
♧ 재의 풍경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워야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얼굴이 흐려질 동안
두 눈에 담았던 풍경이
재가 될 동안
입술에 감추었던 약속과 고백과
지상의 영광과 모욕이
애월 봄볕이
진언이 될 동안
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등으로
봄 햇살을 할퀴며
표범처럼 울었다
♧ 봇디창옷*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끓게도 하지만
봇디창옷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 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옷를 입힌 마음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내 눈에도 뾰족하니 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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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디창옷 : 귀한 아기에게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삼베로 만들어 입힌 어미의 마음. 어미는 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고 기다리지.
**콥데사니 : 제주에선 콥데사니를 제사 음식에 쓰지 않지. 콥데사니라고 부르면 제주의 제삿날이 마늘처럼 매워지네.
***심방 : 신을 모시는 심방들이 징게징게 굿하는 날 신도들이 준비한 제물 든 차롱을 굿당에 나란히 올린다. 억울하게 죽은 저싱 사름을 위해.
****물애기 : 물애기라고 부르면 나도 물렁거리는 진흙덩어리가 되네.
♧ 나쁜 기적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처럼
누가
꽃 속에
비련을 풀어두었나
벌레가 잎사귀를 다 먹었다
아버지의 폐 숨소리처럼
아버지도 그랬다
아침이 되면
나팔꽃처럼
벌떡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벌레가
잎사귀를 먹는 동안
꽃은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는
어떤 눈길로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몸을 바라보았을까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보랏빛 핏줄 선 손등으로
두드리는
나팔꽃
아프다는 건 절벽 같은 것
나팔꽃 지는 저녁은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것
*서안나 시집 『애월』 (여우난골, 시인수첩시인선 079,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