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서안나 시집 '애월'의 시(2)

김창집1 2024. 1. 22. 01:08

 

 

애월, 춘첩(春帖) 1

 

 

달을 가리키는 당신의 손끝이 지혜로운 밤

 

춘첩은 사람 인()처럼 맞대고 붙여야

상서로운 기운을 부른다고 했다

봄도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하다

 

눈이 먼 어머니와 저수지 물결을 밀면

귀 없는 당나귀를 타고

당귀차 같은 사람이 물을 건너온다

 

긴 머리 빗어

연화지 저수지를 세 번 태우면

늦은 편지는 이미 분홍이니

우리는 연꽃 위를 눈먼 쥐처럼 걸어가고

 

어머니의 낡은 카세트 속

지장보살은 늙지도 않는다

 

 

 

 

애월, 춘첩(春帖) 2

 

 

입춘이라 쓰면 착하게 살고 싶다

 

매화 가지에 꽃을 불러 아홉 가지 산나물에 찬술을 마신다

늙은 개는 하루를 굶기고 집안에서 칼질을 삼간다

붉은팥을 뒤로 던지면 매운 수선화 피고 저수지가 깊어진다

 

편지를 쓰면 수심이 깊어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노래하고

매화는 아이들 여린 잇몸에 새 이로 돋고

 

볏집을 태우면 나는 매화 속에서 병이 든다

 

고서를 펼치면 화요일의 감정은 반듯하고

눈멀고 귀 멀어 매화는 무겁다

매화 향기 가두어 차로 마시면

나이 삼십에는 꽃이 어렵고

사십에는 아픈 곳에서 꽃이 핀다

 

커다란 바위 등에 이고 걸으면

서른 걸음마다 물결이 깊어진다

이를 윤이월이라 부르면

 

풍경에도 사람 냄새 깃들어 진흙 물고기가 몰려든다

 

 

 

 

애월, 서투른 결심

 

 

슬픔은 소주잔처럼 손잡이가 없어 캄캄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벽마다 물결로 흩어졌다

 

삶은 돼지고기 한 근에 찬술 마시고

아버지는 북극처럼 혼자 춥다

 

습자지처럼 뒤돌아보면 자국만 남는

슬픔은 그런 것이다

 

봄날 새벽

나도 아버지가 마셨던 녹색 빈 술병을 본다

술병 속에 아버지가 앉아있다

병만 남은 사람의 몸은 고요하다

병 속에서 바람이 흘러나온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애월을 걸으면

물빛이 아버지의 눈빛과 닮았다

당신을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서투른 결심을 한다

 

 

 

 

애월, 겹주름치마상추

 

 

겹주름치마상추 씨앗을 뿌렸다

 

여름비가 내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렁이 되어

정원의 주름을 만들며

어머니 이마 위를

느릿느릿 지나간다

 

어머니와 상추 모종을 옮겨 심었다

어머니의 등에 수북하게 자란 아버지

하얀 실뿌리를 어머니에게 길게 뻗고 있다

 

슬픔에도 간격이 필요하다

어머니의 이마 주름살에

누군가 자주 멈춘 자국이 있다

 

아버지의 커다란 헛기침 소리

오후가 적막하다

 

 

 

 

애월, 공무도하

 

 

1

 

호스피스 병동에서 바라보는 밤은 왜 사무적인 걸까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 앞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2

 

고레다 히로즈의 영화를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를 나눈다는 건 무엇일까

 

3

 

침대에 기대어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할 때

왜 먼지 냄새가 나는 걸까

병실 창밖에는 메마른 구름비나무 한 그루

 

4

 

아픈 사람은 5층 같아서

걸어 올라가다 보면 내가 먼저 지치지

간병은 지루하고

지친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은 구별하기가 어려워

나는 새벽에 병원 지하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인간의 존엄함에 대하여 생각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병실의 시간과 창밖의 구름들

나는 구름을 쳐다보며

어떤 기적 같은 형상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이 저녁

병자들은 무용하여 아름답고

저녁의 문장은 링거처럼 맑고 차갑지

물 끝에 아스라이 서 계신

당신,

 

공무도하

공경도하

 

 

 

                           * 서안나 시집 애월(여우난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