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1)
♧ 시인의 말
한 걸음 뒤로 두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그리고 세 걸음 앞으로. 실패를 자책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작은 좌절쯤은 익숙해질까. 걷다 보면 덜 웃고, 덜 울겠지. 감정도 무뎌지고 매사에 머뭇거림도 없어질 테고. 첫발을 뗄 때의 그 마음은 서서히 더러운 발자국으로 지워질 것이다. 이 발자국을 따라 걷겠지, 돌처럼 나는 굴러다닐 것이다. 길을 지나는 누군가가 나를 아득한 곳에 집어 던져 주었으면, 그 먼데서 길을 잃었으면,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니 나는 잘 안다. 원점으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내가 어떤 ‘근사치’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무섭다. 그게 말뿐인 시밖에 안 된다는 게 섬뜩하다.
2024년 1월
문경수
♧ 단 하나의 의자
의자는 그의 유일한 벗
죽으려는 뜻마저 온몸으로 지지해 주었지만,
살아 보려고 뭐라도 하려는 인간과
죽어 버릴까, 망설이는 인간은 한통속이어서
그를 위해 마련된 단 하나의 의자는 다리가 부러졌다
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죽음을 경배하던 그가
끝내는 양손으로 끊어진 줄을 붙든 비겁함을 보며
밀린 공과금 몇 푼어치가 막막한 사람에게
죽고 싶으면 죽어
타이른 지난날을
나는 뉘우친다
하나 우리를 무릎 꿇리지 않고 앉아 있도록 하는,
그런 우아한 의자는
산 정상에나 있었고
세상은 웃으며
기다란 험로를 일직선으로 늘어놓고
견뎌내기만 하면
누구든 닿을 곳이라 했다
가파른 경사면이 지도엔 생략됐는데도
날이 걸었던 길을 탐내는
환속한 인간들의
발자국을 따라 나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기회는
더는 나아질 게 없는 절망
결국엔 밑바닥으로 치달은 길, 그곳 사람들은
낡은 의자를 고치고 의자를 나르고 색 바랜 의자에 기름칠했다
벼랑 끝을 배경 삶은 이들은 즉각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깟 진흙탕도 대수는 아니므로
나는 의자에 마주 앉아
울면서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비굴하게 설치다가
부러진 의자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나를 향해 기도하는 이 아무도 없어도
♧ 알프라낙스
나는 정신과 의사와 아버지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본다
그는 쉰 목소리로
새벽엔 별 보고 저녁엔 땅 보다가
집에 돌아오는 막노동 생활이 지겹다 했다
분이 안 풀릴 땐 밤바다를 걸으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고
살면서 처음 들은 말이다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몰라서
의사 얼굴을 따라 했다
윤슬이 묻은 바다에 사람이 가라앉고 있다
미안하다,
잠꼬대하는 아버지
흰 약봉지처럼 누워 있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면 알약처럼 풀어지는 것 같다
반쯤 감긴 눈에
귀를 대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나란히 누워 하늘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면
밀물이다
♧ 문경수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는 없고
마주하게 되는 영 엉뚱한 사람들
울고 웃고 때론 고개 숙이고
또 부끄러워지고
경수야, 이만큼은 해야 사람들이 알아봐
이름 석 자를 내걸고 산다는 건
한뉘 거리에 나뒹굴며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치욕을 짓씹는 유치한 짓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수년째
광장에 주저앉아 생존권을 요구하는 보통 사람들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저치라며 욕 들어도
살아내기 위해
이름 같은 건 버린 이들을 모른 척 지나치면
양쪽으로 늘어진 흥성이는 먹자골목 간판들
얼굴을 내건 주방장의 웃는 눈과 마주친다
야, 문경수! 쪽팔린 줄 알아, 새끼야, 좀 제발.
사람들이 제 이름을 소리 내 부르지 않는 까닭
알면서도
뭐라도 된 듯
나 아냐고
나 들어 본 적 없냐고
같은 이름의 누군가를 불러 본다
버려선 안 될 것을 버려 가면서까지
그게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걷는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
*사진 : KBSUHD 명품관 ‘네 개의 욕망, RED’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