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2)

김창집1 2024. 2. 7. 00:13

 

 

사랑의 폐광

 

 

  1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2

 

  당신에게 쓰던 이메일은 유령처럼 사라지고 나는 특별한 질감의 엽서에 당신 이름을 새로 적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몸이, 우표도 붙이지 않은 엽서가 내 앞에 있네

  입 벌린 상처들에는 혀가 없고 출산이 없고 묻혔던 보석이 없고

  이 방에는 지금 유령들뿐, 지우개를 들고 있는 유령과 미래의 유령들-- 쓰게 될 편지와 쓰지 못할 편지들의, 그리고

 

  3

 

  사랑의 폐광에서 내가 채굴한 당신 이름, 날카로운 펜으로 새긴 문신

  나의 첫 줄, 첫 줄이자 마지막 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검지로 문질러 보네

  아, 익숙해지지 않는 질감의 고통

 

 

 

 

제발

    -폴에게

 

 

   폴, 너는 뿔을 잃고 편지를 쓰게 돼 아무도 없는 거리에 서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돼 뿔을 잃고 너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파란 불꽃에 자신을 태우면서 편지를 쓰게 돼 니나는 없어 니나는 이제 없어 니나는 원래 없어 폴, 너는 뿔을 잃고 편지를 쓰게 돼 잊지 마, 너는 죽게 돼 제발 편지에서

 

 

 

 

꿈의 범람

 

 

   당신은 밤을 데리고 온다 밤은 오레오 맛, 혹은 담배 냄새가 난다 유리창 너머에서 도시가 비의 부식(腐蝕)을 견딘다 유리창을 응시하면 얼굴이 흘러내린다 손바닥으로 거듭 지워도 본능은 거기 있다 나는 외면하면서 나의 이면과 마주한다 백지와 마주할 때 나는 역광을, 광배(光背)를 얻는다 어떤 섬광이 흰 벽에 흘러내리는 새장을 그렸다가 지운다 지우개가 작업한다 내가 쓴 시의 암호들이 하나씩 지워져간다 나는 지우개로 쓴 편지를 접어 그림자 새에게 맡긴다 새를 따라 당신에게로 간다 꿈의 비옥한 범람 속으로, 도살장으로, 두께 없는 무간(無間)으로

 

 

 

 

구름의 뉘앙스

 

 

   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네 애인은 네게 그 편지를 읽어준다 내 사랑을 너는 그의 목소리로 듣고 그도 내 사랑을 자기 목소리로 듣는다 푸른 보석 안에서 흰 구름 흐르기 시작한다

 

 

사랑을 말하는 것

    -교환일기

 

 

천변 우거진 풀은 은빛 육십 리

뜨거운 볕에 살이 타올라

타올라, 하늘의 사금파리가 된 것인가

언덕 위 뭉게구름

 

소리 없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네 등의 선

너를 나는 나의 누구로 잘못 보는가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시선 49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