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 2023년 겨울호의 시(4)
♧ 루이스호수* 품에 안아 – 김학균
그렇게 많은 잔설의 눈물들이
주저리주저리 흘러 모인 퍼런 호수
빙하에 적셔있는 이름 없는 전설들
하늘빛 내려놓아 침엽수가 지키는
심산계곡 에메랄드빛 루이스 얼굴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희미한 잔영
긴 세월 놀란 뭇 시새움에 지쳐
혹등고래 먼 북극 여로를 따라갈까?
현란한 찬사에 설레는 로키 여인
저 온통 찬연한 루이스 쪽빛 호수
빅토리아산** 빙설도 꼭 품안에 담아
단풍지는 태백강산을 물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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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호수 : 캐나다 Banff 국립공원에 있는 UNESCO 10대 절경
**빅토리아산 : 루이스 호수 바로 앞에 있는 해발 3,464m의 산
♧ 얼음새꽃 – 이윤정
못다 쓴 옛사랑의 긴 편지처럼
아릿한 모습으로 눈밭에 와서
너는 무슨 온기로 버티고 섰는가!
어느 가슴 치는 이의 유서처럼
이 설한 매운 눈발들을 밀치고
무엇에 기운 받아 세상에 왔는가!
한 마리 말 잘 듣는 양이 되어
얼음과 얼음 사이 비집고 서서
누구의 가혹한 명령을 받들고 섰는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이라고
인간은 얼마나 약한 존재냐고
새벽에 홀로 깨어 기도하는 이처럼
♧ 그 겨울 – 정란
거룩한 시간이 다가온다며
그토록 잠 못 이루며
한때 따스함과 인연을 맺었던 나는
찌를 듯한 헤어짐의 아픔을 뒤로하고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차 한 잔 기울이며
떨어지는 낙엽 문 발을 내리고 밝은 햇빛을 가려
일부러 밤 하나 만들고
혹시나 길을 잃을까
창문 밖 하얀 풍경에 발 도장 찍어
표지판을 만들고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가벼운 나는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무거운 추를 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힘겹게 잠이 든다
[시조]
♧ 산우山友 - 신후식
톡 톡 톡 때그러러
알밤이 알린 가을
청설모 휙 휙 휙
잣 잡수러 나선 길
곰 같은
한 사나이가 일구어 둔 산전 가
묵밭을 갈아엎는
한 무리의 멧돼지
무슨 씨를 뿌릴까
바람이 걱정하고
때맞춰 물주겠다며
구름이 지켜본다
엿장수도 한물가
종이상자 찾아 나선
돌이 할배 어여 와
가쁜 숨 그만 몰고
머루며 다래가 익는
청산으로 돌아와
♧ 꽃의 마음 - 진길자
빽빽한 풀숲 사이 목을 빼고 하늘 본다
뒤따라온 늦여름이 발꿈치를 올려주며
이우는
가을 햇살을
잡으라고 보챈다
생과 사 경계에서 힘겨운 삶이라도
튼실한 열매 맺어 이어가길 소원하며
허공에
중심을 세워
서릿발을 녹인다
*계간 『산림문학』 2023/겨울호(통권5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