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3)
♧ 롱 러브레터
내 안에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할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어머니에게는 외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외할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내 안에는 말이 있기도 전의 영구동토층 아래의 어둠에서 온 편지가 있고 또 그 이전의 일월성신에게서 온 편지가 있다 한 사내가 눈 덮인 천산을 등에 지고 내려온다 광주리 가득 마른 물고기를 담은 아낙이 강을 건넌다 두 개의 엇갈리는 길이 꿈의 매듭을 지은 편지가 내 핏속을 돈다, 하여 나는 얼마간 남자이고 얼마간 여자이다 얼마간 바람이고 흙이다 결코 한 겹일 수 없는 미지(未知)이다 잠 못 드는 밤 나는 내 안의 먼 피를 떠도는 긴 사랑의 편지를 홀로 읽는다 이토록 붐비는 사랑이라니 이토록 사무치는 연연이라니……
♧ 운메이(運迷)*
민주주의
미륵이 오고 있다 온다 오지 않은 것은 계속 오고 있는 것
미륵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눈멀게 되고
아무런 차이도 볼 수 없게 되겠지
도착하지 않는 편지는 아직 오고 있는 편지
우리의 운명(運命)은…… 말하자면 우리는 길 위의 안될 놈들이지만
MC 미륵은 말하겠지 누구라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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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메이(運迷)’는 ‘운명(destination)’과 ‘방황(errance)’을 결합한 프랑스어 조어 ‘destinerrance’를 일본어로 번역한 말이에요 ‘운명(運命)’과 일본어 발음이 같으면서도 본래의 뜻에 ‘헤맴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더해 운명의 고정성이나 불변성을 해체해요 목적지를 알아도 우리는 길 위에서 항상 미아(迷兒)가 될 수 있어요
♧ 반복
연출 선생이 배역을 정하는 데 골몰한다 모두 폴이기를 바라지만 폴은 한 명이다 나는 풀이다가 니나가 된다 니나는 미륵이 되고 미륵은 폴이 된다 아침에 쫓는 사람이다가 저녁에 쫓기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편지는 오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편지가 온다 나는 연출가가 된다 모두 폴이 되려 하니 큰일이다 극단 대표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거울 안에서 스핑크스는 부은 발을 주무른다 나는 극단 대표가 되어 연극을 본다 무대 위에서 랭보가 말한다 나는 타자다! 중요한 것은 그뿐이다 나는 타자다. 이 말이 누구의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내뱉는다 소년에게 그 말을 해준 것이 바로 나일까 모든 배역을 거치려고 한없이 돌아오는 윤회, 모든 사람이 되려고 한없이 돌아오는 나, kryptonite 아침에 일어나면 까닭 없이 슬프다 무엇을 잃었는지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는 되찾은 자가 되리라 편지가 오리라
*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