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의 시(5)
♧ 긴 무덤의 끝
겨를 없이 뱃길에 떠밀려
대전형무소 차가운 벽에 머물던
귀향의 꿈은 실핏줄마다 그물을 엮었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여명을 덜컹거리며 곤룡재 넘을 때도
죽음이 죽음을 덮는 골짜기가 될 줄은 몰랐다
수로처럼 길게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머리 박고 엎드려 살려달라는 말조차 잊었다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
뼈와 혼령이 산처럼 쌓인 골령골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의 끝에서
비바람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을 닦는다
죽음을 이겨낸 사월 바람이
밭갈이 때 나온 뼛조각들 비료 포대 걷어내고
늙은 누이가 젊은 사진을 품고 울었다
오빠! 오빠!
늙은 아들이 색 바랜 엽서를 움켜쥐고 울었다
아버지! 아버지!
부름과 부름이, 눈물과 눈물이 삽을 들고
긴 무덤의 끝을 씻는다
♧ 산매자나무
하필이면
비탈을 찾아서
내 터지는 계곡 벼랑 위에
터를 잡고
목본인 것이
초본인 것처럼
모여 앉아
한 세상 돌돌 말아 꽃잎에 올리고
앵두 같은 젖꼭지를 대지에 물리는
아으 나도
네 어미의 나라에 안기고 싶다
♧ 천남성
처음부터 독을 품지는 않았다
한때는 주리고 시린 이의
황급한 끼니였으니까
편견과 편협한 아집들이 할퀸 자리에
굳은살이 배어
온순한 것들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속으로 떠밀린 설움이
백두옹이 되고도 기어이 별빛을 바라
동가식서가숙 목 놓아 생을 부르며
한 해는 암꽃으로
한 해는 수꽃이 되어 봐도
괴롭지 않은 삶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계절의 끝자락 저쯤에서
새빨간 열매로 반들거릴 때
더는 부러울 게 없지 싶었다
세상에 독초는 없다
어떤 풀도 순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고락을 피하면 덤불이 나온다
눈길 닿는 그곳에
빛나는 마음 하나 거기 있다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 (도서출판 각,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