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풀문학' 2023 제18호의 시(6)
♧ 족두리꽃 – 양민숙
책상 한 귀퉁이 자리하던 시집을 펼치니
마른 꽃대 끼워둔 책장 사이
평대리 족두리꽃 피었다
땅 한 평 없어 가난하다던가
걸음 닿는 곳, 씨앗 뿌리고
거리마다 족두리꽃 피었으니
평대리 모든 길이 복기 씨의 꽃밭이다
한껏 치장한 족두리
내려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마르고 말라서 가슴 타들어 가면
달밤에 행인 지나는 기척에도
후두둑 후두둑 씨앗을 털어낸다
하얀 시간은 흘러가는가
씨앗을 받는 일은
달밤이어야 하는 것
너의 가슴에 문을 두드리는 것
대답 없는 걸음을 보내주는 것
시집 안에서는 사랑 이루어질까
붉게 더 붉게 피는 꽃
♧ 조개껍질 무덤 29 – 이성윤
바람도 배가 고픈지 징징 보채는 듯
저녁이면 모래바닥을 헤치고
밥 먹고 나면 부른 배를 치다가 잠잠해질까요
고기잡이 나가던 작은 배는 뱃머리를 돌리는데
무덤을 떠나간 친구들은 오지 않고
우편배달부 복어아저씨도 빈 가방으로 돌아왔지요
기다림이란 어깨가 무거워지고 마음은 가출을 하는
무겁고 아픈 일인 것만은 아닌 거겠죠
이런 날 비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 너는 바람이 아니라 - 이정은
깊도록 걸어도
발등으로 번지는 물결무늬
바람 소리에 쓰러져 누워
그물망에 스스로 묶이는
너는 바다가 아니라
너는 바람이 아니라
흰머리 풀어헤친 흐느낌
아기 발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소금 울음
가늘게 떠도는 습자지처럼
은박 입힌 오랏줄
걸어 나올 수 없는
푸른 얼룩
*한수풀문학회 『한수풀문학』 2023년(통권 제18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