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2)
♧ 세한도 여정을 읽다
별도봉 가는 길에 내 눈을 사로잡은
‘세한도’ 다시 만난 추사秋史와 제주
우뚝 선 제주국립박물관
두루마리* 펼쳤다
모슬포 거센 바람
수선화 맑은 향기에도
스승의 눈빛마저 가물가물 저물어가고
대정골 가시울타리 안
외로움만 살찔 때
북경 길 발품 끝에 만난 귀하디 귀한
만학집晩學集,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조선 땅 삼천리 가로질러 풍랑의 바다 건너
서책이 적거지에 들어온 봄날 오후
웅크린 자릴 털고 제자의 지극정성에
스승은 갈필을 세워 고마움을 그리다
메마른 벌판 위에 허술한 초가 하나
노송의 긴 가지가 꺾일 듯 뻗어 있고
벌판에 잣나무 두 그루 형제처럼 서 있는
툭 던진 한마디 말 ‘우선藕船**, 감상하게’
권세와 이득에 물들지 않은 의리
절대로 변하지 말자
낙관***으로 말하다
상적이 세한도를 펼쳐 보는 순간
절로 흘러내린 감격의 눈물 갈아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감사 편지 쓰다
-이번 사행使行길에 연경燕京에서 표구하고
옛 지기知己 분들께 두루두루 보인 후에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하오니 해량하여 주소서-
신의를 굳게 지킨 사제 간 마음 읽은
청나라 초청 문사文士 붓 들어 일필휘지
열여섯 제찬制撰을 받고
경성으로 돌아오다
이 손 저 손 건너 현해탄 건너버린
기막힌 사실 앞에 달려간 손재형***
석 달간
간청에 감복한 후지즈카****
조건 없이 돌려주다
해방 후 정인보, 이시영, 오세창도
보물이 돌아온 것은 강산을 되찾을 징조요
고심에 찬 삶을 겪은 선열이다 찬讚하다
인생, 가고 옴이 꿈과 환상일까
영원한 주인 찾아 돌고 돈 178년
손창근****** 숭고한 기증에
한반도가 환호하다
특별실 유리관 속 짙은 묵향 따라
꿈틀대는 세한도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에
서서히 무딘 내 영혼도
서서히 깨어나더니 반짝이는 이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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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15m ** 제자 이상적 호 *** 長毋相忘(장무상망 :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이라 쓰여 있다 ****서화가 *****추사를 무척 존경하고, 세한도를 소장했던 일본인 ******손재형 아들 손세기 선생 장남으로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 (동학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