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5)
♧ 광주에는 극락강이 있다 – 이성목
서창 길 헤매다가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를 건너는 줄도 모르고 건넜다
그래도 영 길을 모르는 천치는 아니어서
구 시청 가는 길을 알고 충장로도 안다
5·18 묘지로 가는 변두리 길도 알아서
그게 광주의 큰길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광주에는 아는 길이 없어 물어서 다닌다
경상도 말로 길을 묻는 것이
거시기할 때도 있다 나는
이유를 모르지만 아는 사람도 있다
아는 사람은 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서
어떤 길은 모르는 척 가거나 가지 않아도 된다
광주 사람도 네비게이션도 말해주지 않았던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인 줄도 몰랐으니
건너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면 되는 길이었다
갔다가 아차 이 길이 아니었구나 돌아섰을 때
무심하게 건넜다가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다리 아래를 지나는 극락강을 보았다
극락강이라는 푸른 표지판을 보았다
♧ 극락강역 - 나희덕
극락강이라는 역이 있기는 있을까,
광주역이 가까워오면 늘 두리번거렸다
극락강역을 놓쳐버린 시선은
번번이 광주역 광장의 어둠에 부려졌지만
어느 날 들판 사이로 흐르는 실낱같은 물줄기와
근처의 작은 역사를 보았다
역 앞에 서 있는 여자 아이도 보았다
때 절은 옷을 입고 아비를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
바리데기를 기차는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아이의 헤진 옷에서 풀려난 실오라기가
강물처럼 따라와 내 삶의 솔기를 홀치고
바리데기는 강을 건넜는지 다시 보이지 않았다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극락강역,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지만
대합실에는 오롯하게 불이 켜지고
등꽃 그늘에 누가 앉았다 간 듯 의자 몇 개 놓여 있다
그 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生은 또 한 겹의 물줄기를 두르고
언젠가는 죽음의 강물과 合水하는 날이 오겠지
극락강이라는 역에도 내릴 수 있겠지
♧ 극락강역 인근 - 강경화
멈춘 듯 흐르는
놀 비친 강을 지나
뒷짐 지고 서성이는
할머니의 환등처럼
기차가 달리는 한 때
그리움도 둥글어
♧ 극락강 - 황지우
사람들이 시간을 하두하두 흘려서
바닥난 강
모래 밑,
한 때 느릿느릿한 남풍과
드높은 새털구름이 얹혀 있던 수면을
기억할 수 없는 길,
그래도 강은 있네
시간이 있으므로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건네는 데 0.3초도 안 걸리는
극락강
며칠 후, 며칠 후 우리가 건널
극채색의 흰 강
멀리 미루나무 근처
소풍 나온 또 다른 세대의 어린이들 보이고
그러나 그 아이들을 내가 보았는지
기억에 없네
내가 그 강을 건넜는지도
기억이 안 나네
*월간 우리시 3월호(통권 42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