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 가을호의 시조
♧ 야생화 – 김수야
뒤덮인 고요 속에
바람조차 숨이 멎는
한 무더기 그리움
그 숲에 있었네
손길이 닿지 않아도
인연 또한 깊은지
가랑비 오기 전에
푸더덕 날으는 새
산자락 물들이네
반가운 안부 같은
넘나든 메아리 따라
터트리는 방울꽃
♧ 눈빛이 들키는 거리 – 김수연
반나절 계곡 길을 더딘 걸음 걷다 보면
산까치 날아올라 흔들리는 구름 사이
주름진 빛살 겹겹이 포개지는 푸름 저 안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가 끄는 대로
느긋한 발걸음을 떠미는 바람 따라
자잘한 붉은 꽃들이 터질 듯 떨려오고
축축한 숲 둘레에 물씬히 젖은 냄새
온몸을 들이미는 벌 나비처럼 보채고
가까이 눈을 맞추고 꼬드김 기다리며
♧ 콩밭벌 전투 - 김종호
콩밭을 차지하러 몰려든 잡초군단
빽빽이 들어차서 인해전술 못지않아
곡괭이 움켜쥐고서 수천 합 겨루었다
단번에 쓰러지는 쇠비름 졸개들과
목숨줄 질겨빠진 바랭이 상장군도
관우의 청룡언월도 같은 곡괭이에 쓰러졌다
그들만 쓰러졌나 아군도 피해 속출
곡괭이 휘두르던 검지에 물집 잡혀
따갑기 한량없지만 남모르게 숨겼다
♧ 수목장 – 우형숙
내 마음의 사다리에
너의 모습
묶어두리
그리움의 동아줄은
하늘가에
걸어두고
이파리
일렁댈 때면
너를 본 듯 반기리.
♧ 가을 산에서 – 전현하
탄성이 절로 나는 가을 산에 올라보니
계절의 끝자락엔 이별을 예고하고
세월에 입은 내상內傷은
옹이로 박혀온다
계곡을 넘나드는 천년세월 저 바람이
포개진 능선으로 낙엽을 흩고 갈 때
가지 끝 산새 울음에
눈을 잠시 감아본다
세상은 나날이 시끄러워 지는데
지친 몸 이끌고 찾아든 숲 속에서
내일의 고요 속으로
길을 묻고 떠나는…
*사단법인 한국산림문학회 간 『산림문학』 2023년 가을호(통권5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