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배진성 시집 '우리들의 고향'의 시(2)

김창집1 2023. 10. 7. 00:00

 

 

억새꽃

 

 

아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직까지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억새꽃은 억새꽃만큼 울고

바다는 바다만큼 울며 살아간다

오직 사람들만이

슬픔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나에게만 슬픔이 있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누구에게나

그만큼의 슬픔은 있는 법인데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억새꽃이며 바다의 혀들이

오늘따라 너무나 조용히 빛나고 있다

 

 

 

 

액자 - 배진성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가 있다

오지 못할 사람을 대책 없이 기다리는 때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새벽이 액자처럼 걸려있다

 

방 안에 액자 하나 걸려있다

사연이 참 많은 액자 하나 걸려있다

나무틀 액자 하나 아침처럼 걸려있다

내 왼쪽 가슴 속 깊이 박혀있는 못 하나에

액자 하나 지금까지도 걸려있다

 

그 액자 속에 있던 사람 대신

지금은 내가 들어가 갇혀있다

1986년이었던가 1987년이었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왔던 내가 들어있다

한라산이었던가 어느 오름이었던가

안경 쓴 내 뒤로 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시여, 내가 낳은 시들이여!

황소의 쟁기질처럼 끊임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강히 자라는 일꾼이길 바란다

이런 글자들도 함께 갇혀서 기침을 하고 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내린다

내 가슴속에 갇혀있던 액자를 꺼낸다

그 액자 안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글자들을 꺼내어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시 비어있는 액자틀만 벽에 건다

그 빈 액자에 느닷없이 새로운 아침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도시 나무 - 배진성

 

 

청산에 살지 못하고 도시로 끌려가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들의 발목에서 쇠사슬 끌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이 독가스실로 끌려가고 있다

가스실 앞에 줄서있는 가로수들 떨고 있는 그 사이로

돼지들이 실려 가고 있다 끊임없이 실려 가는 울음소리

도살장 앞의 나무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돼지는 돼지들대로 가로수는 가로수들대로 떨어뜨리고 있다

나뭇잎이 떨어져도 돌아갈 곳이 없다

새벽부터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둥근 빗자루를 돌려

아스팔트길을 쓸어 담고 있는 청소차가 지나간다

쓰레기차를 피해 간신히 도망쳐 나온 나뭇잎은

하루 종일 길을 헤매다가 하수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어린 가로수들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버팀목으로 서 있던 세 개의 각목,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나무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고 있다

도시로 끌려나온 나무들은 뿌리 내릴 곳이 없다

땅 속에서라도 뿌리는 따뜻한 뿌리를 만나고 싶은데

만나는 뿌리마다 전기가 흐르거나 소리가 흐르는

너무나 뜨겁거나 너무나 차갑거나 너무나 시끄러운

무서운 전선뿐이다 땅 위에도 땅속에도

온통 전선뿐이다 정녕 전쟁터 아닌 곳이 없다

 

청산에 살지 못하고 도시로 끌려나온 나무들이 있다

아예 청산은 보이지 않고 가스실 문이 닫히고 있다

 

 

      *배진성 시집 이어도공화국우리들의 고향(시산맥,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