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4)
김창집1
2024. 4. 23. 00:12
♧ 그래도, 봄
서북의 하늘빛이 핏물 뚝뚝 떨굴 동안
뒤돌아 얼굴을 묻는 동남쪽 오름과 바다
스스로 칼이 된 달이
어둠의 샅 겨냥한다
한라산 까마귀야, 상복은 언제 벗을래?
애기동백 가지 끝에 세를 든 동박새가
꽃술에 거꾸로 매달려 물음표를 그리고
된바람 기척만 나도 머리를 풀던 구름
한라산 고사리밭에 용울음을 쏟을 때면
속까지 타버린 섬이
불을 물고 일어선다
♧ 관덕정 돌하르방
보고도 못 본 듯이
멍에 하나 지고 산다
자식 잃고 아내 잃고 눈물마저 앗긴 세월
그 천형 씻을 수 없어
청맹으로 살아간다
끊어진 시신경을
깁고 잇고 맞춰보면
퉁방울 두 눈에도 봄 햇살이 환히 들까
먼 바다 파도소리가
가슴골을 할퀸다
♧ 탕, 탕, 탕
느닷없는 총소리가 화산섬을 들깨웠다
기마대 말발굽이 무심코 일으켜놓은
사이렌 흙먼지 앞에 꼬리를 사린 봄날
쑥물 든 오름마다 봉홧불이 타오르고
주인 없는 초집까지 날려 오던 불티들
바람은 파도를 몰고 산을 톺아 올랐다
낮과 밤 언저리를 숨죽인 채 해매 돌다
해도 달도 들지 않는 굴속에 몸을 뉘면
생솔과 고춧대 연기 사냥개처럼 달려들고
붓기 아직 빼지 못한 눈 퉁퉁 돌하르방
그날의 탄흔 같은, 어쩌면 흉터도 같은
다공증 곰보 기습이 고사리마에 젖는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