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4)

김창집1 2024. 4. 23. 00:12

 

 

그래도,

 

 

서북의 하늘빛이 핏물 뚝뚝 떨굴 동안

뒤돌아 얼굴을 묻는 동남쪽 오름과 바다

 

스스로 칼이 된 달이

어둠의 샅 겨냥한다

 

한라산 까마귀야, 상복은 언제 벗을래?

애기동백 가지 끝에 세를 든 동박새가

꽃술에 거꾸로 매달려 물음표를 그리고

 

된바람 기척만 나도 머리를 풀던 구름

한라산 고사리밭에 용울음을 쏟을 때면

 

속까지 타버린 섬이

불을 물고 일어선다

 

 

 

 

관덕정 돌하르방

 

 

보고도 못 본 듯이

멍에 하나 지고 산다

 

자식 잃고 아내 잃고 눈물마저 앗긴 세월

 

그 천형 씻을 수 없어

청맹으로 살아간다

 

끊어진 시신경을

깁고 잇고 맞춰보면

 

퉁방울 두 눈에도 봄 햇살이 환히 들까

 

먼 바다 파도소리가

가슴골을 할퀸다

 

 

 

 

, ,

 

 

느닷없는 총소리가 화산섬을 들깨웠다

기마대 말발굽이 무심코 일으켜놓은

사이렌 흙먼지 앞에 꼬리를 사린 봄날

 

쑥물 든 오름마다 봉홧불이 타오르고

주인 없는 초집까지 날려 오던 불티들

바람은 파도를 몰고 산을 톺아 올랐다

 

낮과 밤 언저리를 숨죽인 채 해매 돌다

해도 달도 들지 않는 굴속에 몸을 뉘면

생솔과 고춧대 연기 사냥개처럼 달려들고

 

붓기 아직 빼지 못한 눈 퉁퉁 돌하르방

그날의 탄흔 같은, 어쩌면 흉터도 같은

다공증 곰보 기습이 고사리마에 젖는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