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조(1)
♧ 아가미 호흡으로 - 김연미
부재중 전화가 떠도 너는 연락이 없었지
기억의 한 모퉁이 섬이 점점 작아지고
꽃 피고 눈이 내려도 멈춘 시간이었지
스팸메일 안부 같은 이름으로 남았을까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가야 할 길은 멀고
이쯤서 되돌아갈까 너의 바다 속으로
안개 낀 교래 곶자왈 핑계처럼 길을 잃고
장맛비 그친 숲속 코끝까지 물이 차면
잊었던 아가미 호흡이 다시 편안해질까
골고사리 표주박이끼 수정이 된 바위수국
반가움과 낯섦이 갈등처럼 엉키는 사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네가 거기 있었다
♧ 니들의 판결문 – 김영란
단 한 명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 했지
제주사람 300명 7년형 선고 받고 형무소에서 손꼽던 만기출소 꿈은 가고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에 누웠지 그 무덤 골짜기마다 흘러내린 울음소리, 78년 긴 시간을 돌아온 홍범도장군 장군묘역 돌아보다 눈 나오고 입 벌어지네 니가 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장군 제1묘역 함병선 연대장 니가 한 일 우리는 다 알고 있는데 니가 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그 환한 양지녘 풍수지리 몰라도 최고 명당 그 자리에 삔주룽히 낯짝 들고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이 잡듯 뒤진 곳에 최경록 신현준 서종철 유재흥 김두찬 니들이 왜? 니들이 왜 거기서 나와? 삔주룽히 낯짝 들고 피 냄새 진동하는 니들이 왜? 니들이 왜 거기서 나와?
역사의 심판 앞에서 니희들은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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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영탁의 노래 제목 차용.
♧ 한 끗 차이 - 김영숙
서릿발 하루 업고
저녁장 보는 마트
물비누에 온수 콜라보
흙손 씻는 그 순간
손가락 사이사이로
봄이 내게 스몄어
수선 서향 명자가
차례로 지고 나면
복사꽃 화안한 날
꽃그늘에 널 부를게
꽃샘이 우리를 할퀴더라도
오늘의 코드명 ‘무슨 사정 있겠지’
♧ 타지마할 소묘 – 오영호
그녀는 궁전의 왕관 시간에 마술을 건*
연못에 거꾸로 선 채 사자한** 러브스토릴
분수는 천상을 향해 뿜어낸 지 400년
영혼이 숨 쉰다는 이슬람 넓은 정원엔
바람 탄 꽃향기와 흐르는 세레나데
신성한 야무나강 물소리 내 가슴이 젖네요
양파 돔 아라베스크 빛의 각도 따라
해 뜨면 푸른 벽이 핑크로 머물다가
저물녘 우윳빛으로 연출하는 타지마할
지독한 아내 사랑 황제는 우아함으로
예술의 붓을 들어 세운 무덤 앞에
사랑은 번뇌의 화두라고 오늘도 묻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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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고르의 ‘타지마할’시에서 차용.
** 무굴제국의 5대 황제.
*계간 『제주작가』 봄호(통권 8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