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철 유고 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조(3)
♧ 성산포 못 미쳐서
성산포 못 미쳐서 돌아설 걸 그랬다
일출봉 근처에 와도 뜨는 해를 못 보고
조간대 밥벌이하는 게들만 보고 왔다
게야 게야 달랑게야 너도 집이 있는 거니?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허름한 집 사놨는데
오 년이 그냥 흘러도 시 한 편을 안 주네
성산포 어느 변두리 외등으로 나앉은 마을
문턱을 넘나드는 파도 소리 산새 소리
저기 저 삶 속에 나는 끼지 말 걸 그랬다
♧ 청미래 꽃만 피어도
수많은 암자 중에
왜 이곳으로만 이끌릴까
불사는 못 이뤘지만
청미래 꽃만 피어도
쌍계암 목불을 안고
한없이 울고파라
♧ 문득 만난 마을
간혹 산에서 만나는 팻말 잃어버린 마을
여기는 어디이고 이 우물은 누가 마셨을까
소개령 흩어진 사연 저 오름은 알고 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명도 안 돌아온다
칠십 년 피고 진 벚꽃 그리움도 연좌제일까
어느 집 깨진 거울 조각이 나를 빤히 보는 것 같다
고려인들이 그랬듯 몇 사람만 모여들면
시베리아도 화산도도 일궈내질 않았던가
봄 들판 포크레인 끌고 더운 흙을 파러 가자
♧ 바람까마귀
이름 없는 까마귀 떼로 우는 까마귀떼
아무리 철새라지만 제 분수는 알아야지
남의 땅 한 구석에서 식량 전쟁 벌이나
어쩌다 시베리아와 제주 섬이 인연 맺었나
이 밭 저 밭 옮길 때마다 저절로 밭갈이 되고
까마귀 네댓 마리면 병아리도 채간다
열차는 밤 12시 시베리아를 달린다
한라산 소주보다 두 배 더 독한 보드카 주
북촌 땅 까마귀 저도 몇 잔술에 취했을까
*오승철 유고 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 (다층,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