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2)
♧ 너울성 파도 - 강동수
태풍이 지나간 뒤
바다로 나가보았다 파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난
태풍의 꼬리를 잡고 요동친다
이런 날은
내 마음도 너울거려서 꼭 할 말을 해야 하는데
다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런 날처럼
입술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예고 없이 방파제를 넘나드는 포말들
나는 누구의 마음을 넘어서
가슴에 흰 얼룩을 남긴 적 있었던가
일기예보는 일렁이는 파도에 파랑주의보를 남기지만
아직 오지 않은 먼 곳에서의
태풍의 눈이 화면을 채우는 오후
세상을 사는 것이 일렁이는 파도 같아서
먼 길을 달려온 파도를 견뎌야하지만
예고 없는 이별들은 긴 상처를 남기고 사라지는
너울성 파도 같은 것
오늘이라는 시간을 지나며
한 번도 건너가보지 않은
또 다른 파도를 건너야하는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 줄탁 – 방순미
산이 품은 알
병아리 노란 웃음
터질 듯한 달걀버섯
탱탱한 긴장에 베인
폭염,
눈가
서늘한 바람 돋는다
♧ 러브 락 - 윤태근
사랑이란 저렇게 뜨겁게 묶고 묶이고 싶은 걸까?
남산 위 펜스 철망에는 오글오글 앙다문 이빨들이
7월의 소나기를 맞으며 고집스럽게 녹슬어 가고 있다
열녀문 환향녀란 유산과 함께
상어 아가리처럼 강철 이빨을 벌리고 있던
영국 박물관의 정조대는
불신의 사랑과 함께 전장으로 향하는 기사들의
일그러진 믿음이 아니었을까?
삶이란 완전해지기 위한 성장의 과정이라는데
사랑이란 생명에 대한 애정이라는데
소유와 지배의 욕망이
미화된 자물쇠로 안심해야 하는 인간들의 슬픔이여!
내던져버린 열쇠의 기억은 아득히 어디에 있을까?
뜨거운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러브 락들은
그렇게 녹슬어 가는 사랑을 매달고 있는데~
♧ 사랑 – 정형무
고갯마루에서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오십억 년 뒤
부푼 태양이 지구를 먹어버린대요, 훌쩍거렸다
아가, 나도 별이 무섭단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구름 속 달이 보이기를 기다렸다
♧ 그러며 꽃 피는 것이다 - 신호철
흔들린다고
단단하지 않은 건 아니다
흔들린 만큼 단단해지는 것이다
꽃도 흔들리며 피고
갈대도 목까지 누워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청청한 소나무도 처음
여린 순 내밀고 흔들린 만큼
뿌리 깊이 내리는 것이다
내 어머니도 흔들리며 날 키우셨다
아픈 만큼 사랑하며 보듬으셨다
흔들리는 모든 것은 아프고 또 아프다
지나보면 그 아픔으로
꺾이지 않고 자라는 것이다
그러며 푸르러지는 것이다
다만 견딜 만한 시간이 필요할 뿐
처음은 누구나 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며 꽃 피는 것이다
*월간 『우리詩』 2023년 10월호(통권 42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