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6)
♧ 시작노트 2
시도 그렇다
현실의 내가 아등바등 일에 치여 모두 벗어던지고 싶을 때, 시가 나를 항해 손짓한다
나는 그 손을 한두 번은 뿌리친다
세상엔 복잡한 시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들을 느끼고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온 나는
그 즐거운 것들이 이끄는 곳에서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어떤 내 안의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허우적대기만 했을
뿐이라는 걸
시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온 정성을 들이며 나를 달구며 두들겨야 한다
그래야만 시가 단단해진다
♧ 썩은 시가 되고 싶다
간간이 다가들던 풋 생각 날로 익어
그 생각 썩고 썩어 내 시가 발효되면
멍들어 아린 자국들 봄 햇살에 말리자
그러다 누군가의 지릿한 오줌 되고
그러다 누군가의 물컹한 똥도 되지
거기서 날밤 새도록 서성이고 싶어라
푹푹 썩어 들어가는 그 시 이름 앞에
내 생각을 또 다시 갈가리 찢다 보면
먼 훗날 내 시에서도 새순이 돋아나겠지
♧ 깊숙한 이빨
살다가
이 하나가 흔들린다 싶으면
마음속 돌무더기 꿈들댄다 손닿으면 시큰시큰 바람 든 이마다, 어디가 아픈 건지 어디에서 오는 건지 근원지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날이 갈수록 뾰족해지고 깊숙해진다 마음의 돌기들, 흔들리는 통증을 견딜 때마다 때 되면 누구나 다 흔들리는 거라며 흔들흔들 대답한다
가지런한 아버지, 누런 앞니 하나 남을 때까지
가지런한 어머니, 누런 앞니 하나 남을 때까지
딸 아들 칠 홉 송장이 되어가며 입들에게 오물오물 대주었던
내게도 상어의 깊숙한 이빨처럼 상처투성이인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아플수록 찬란해지는 통증의 노래를 부르려는 것이다
그렇게 거룩한 밥이 되어주는 것이다
♧ 석굴암에 오르다
행간을 놓친 삶이 휑하고 버거울 때
석굴암에 오른다
온갖 번뇌 씻기며
비워라 내려놓거라 바람 소리 스치네
사념도 내려앉는 암자에 다다르면
두 평 남짓 요사에
낡은 신발 한 켤레
수십 번 절하고서도 욕심을 못 버렸네
시간의 문을 닫고 가만히 누워본다
푸르고 그늘 좋아 노란 꿈도 꾸는 사이
누군가 흘리고 간 기도에
아기단풍 물들었네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동학시인선12,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