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5)
♧ 꽃 진자리 - 김영란
부여는 낙화암
진도는 궁녀둠벙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전설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먹먹하게 새겨지고 비만 오면 여인의 울음 구슬프게 들린다는 어느 역사 한 귀퉁이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삼별초 왕온의 서글픈 궁녀들, 죽음으로 지켜낸 정절의 시간들 목숨의 뿌리처럼 둠벙으로 내려와 생목숨 부려놓고 간 어여뿐 딸들의 넋
맺힌 한 풀고 가시라
이승 한 씻고 가시라
♧ 해삼 - 김진숙
어둠을 건너온다
일생이 물컹하다
물 밖으로 나온 고모는 금세 단단해진다
사는 건
단단해지는 것
늦은 저녁상을
차리듯
♧ 전주라고 - 오영호
전원은 들어와도 화면은 먹통이라
AS를 쳤네 30분 후에 올 수 있다고
예정된 시간 넘어 다시 물었더니
“전주에 올라와 있어요
내려가서 전화할께요”
전주에 올라갔다고요
전봇대요 전봇대
♧ 맨발 - 장영춘
때로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긴 여정의 모퉁이에 약속처럼 피어난
물매화 마른 들녘에
맨발로 웃고 섰다
초롱초롱 해맑은 그대 앞에 내가 서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산비탈로 내려서고
슬며시 등 토닥이며
향기마저 모아준다
그렇게 가는 거다, 충만함도 나누며
높아진 하늘 보며 막혔던 혈을 뚫고
용눈이 가설무대엔
전석이 매진이다
♧ 금수(禁樹), 동백 - 조한일
동백나무 허리께
하나 남은 동백꽃
그토록 붉디붉던
유배인의 금수(禁樹)라던가
내 너를
지켜 주고자
맹세하는 오늘 밤
떨어진 동백 차마
쳐다볼 수 없어서
고개 돌려 모함 같은
북풍한설 맞을 때
역적이
충신이 되는
반전을 꿈꿨을까
♧ 미풍간이식당 - 한희정
선지피 닮은 낙엽
발등에 엉겨 붙네
뒷마당 연탄불 위 피거품 문 양은솥
추억은
한 국자 한 국자
뭉글뭉글 퍼 올려
여고생의 자취방 앞, 감성 따윈 아랑곳없어
술에 취한 손님에게 손목 한번 잡혔다고
처마 밑
무청 이파리
꾸역꾸역 풀 죽었지
여전히 시장기 감도는 한짓골 돌아들면
열일곱 심장이 뛰듯 간판 불은 여전한데,
뽀얗게
실루엣 하나
미풍을 몰고 오네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통권 제85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