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6)와 억새
♧ 새벽 운동
사선으로 날아드는 화살촉 햇살이
어설픈 어둠을 털어 내는 나의 새벽은
하루치의 보험료를 납부하는 경건한 시간
푹푹 찌는 한증막과 냉혹한 한파에도
거를 수 없는 내 보험료의 질료는
심연의 잠을 들어 올리는 수고로움과
무덤처럼 널브러진 근육과 혈액의 에테르를 소환하여
궁극의 인내와 숨결의 절박함을 격발시키는 것,
깊숙이 파고드는 신성한 공기를 아이처럼 맞이하는 것
질병과 고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의 보험금은
실존하는 평안과 시들지 않는 내일이다
♧ 개,
소리 - 이영란
이름은 모르지만
그는 분명 개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에는 늙은 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슨 개소리야
화단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소리친다
자꾸 개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그의 얼굴을 잊어버렸다
개소리 하지 마
개가 등 뒤로 멀어진다
나는 잠들기 좋은 자세로 앉아
개소리를 내다가
개소리를 하다가
♧ 우이령 가는 길 – 이제우
우이령 옛길을 가다가 보니
우뚝 선 삼각산과 도봉산이
형님 아우 하며 어깨동무하고 있네
꾸부렁꾸부령길 가다가 보니
누구의 넋인 양 진달래 붉게 피고
오봉 전설에 신나게 웃다가
석굴암 전설에 눈물을 글썽인다
손에 손잡고 가다가 보니
하루 종일 톡톡톡 토도독-톡
오색딱따구리 사리를 캐고
두 손 모은 달맞이꽃 누구를 기다리나
녹음방초 우이령 길 가다가 보니
백운대 흰 구름이 쉬어 가라 손짓하고
쇠귓골 맑은 물도 놀다가 가라 하네
♧ 파문에 젖다 – 임미리
바다가 부르는 곳에 생각이 들어선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외곽의 나날이다
바다는 무료한 하늘을 들여놓고
쏴아 쏴아 목청껏 위문한다
못 이기는 척, 바닷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사그라들다 밀려드는 파도
심드렁한 허벅지를 휘감으며 태연하다
바다는 낯선 바람에 수없이 출렁이면서
이우는 파도의 소란에 배후를 묻지 않고
날 선 모서리를 둥글게 품어 준다
바다가 수없이 보내는 아스라한 파문
환상을 꿈꾸었던 한때가 똬리를 푼다
소통되지 않는 언어에 호기심만 커졌고
끝내 맺지 못한 처연한 인연처럼
바다는 속절없이 그리움만 점거했다
한쪽 발은 모래사장에 묻고 다른 발은 바다에 담근 채
속세를 떠난 천상의 자리 탐하는데
숨어든 그 마음 들켰을까
파도가 숨 가쁘게 몰려와 이방인을 위협한다
휘청, 수없이 내몰렸던 밖의 삶이었지만
처음인 듯 생각은 기꺼이 파문에 젖어 창백하다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 어떤 풀잎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숲속에 긴밤이 찾아온다
우수에 찬 이방인 김모(60대)씨가 나무 벤치에 앉는다
달빛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수풀에 너울거린다
그 그림자를 사뿐히 지르밟는 얼굴이 야윈 여인,
그녀의 눈이 그의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향한다
그대여
그대는 지금 두려운가요
그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니요 두렵지 않다오
그대가 내 곁에 있는 한
난 결코 두렵지 않다오
그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한다
저 하늘의 달빛이 꺼져도
이 숲속이 모두 사막으로 변해도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난 기뻐한다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마른 입술에 잠시 생기가 돈다
그의 두 손끝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싼다
그는 애원한다
그대여,
그대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내 곁에서 있어 주오
저기 한 이방인 곁에서
바짝 말라가는 풀잎이 바람에 바스락거린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푸른 달이 된다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35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