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9)

김창집1 2024. 11. 4. 00:15

 

 

종이 인형

 

 

이미 북촌을 걷고 있었다

 

같이 걷던 발걸음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듯

골목에서,

달력 그림처럼

한옥 처마의 곡선을 사진에 담았다

거기에 서 있는 누군가가 함께 찍혀 나올 것 같아서

 

길게 줄을 서서 국수를 먹으면

거기에 같이 기다린 사람이 서 있을 것 같아서

 

먼 곳에 있는 추억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우리가 언제 함께했는지 기억을 의심하면서

 

마주 닿은 가슴이

포개진 적이 언제였는지

사실은 그렇듯

하 며마 보다

꿈속에 보는 것들은 늘 한 면만 본다

 

닫힌 대문에 걸린 종이 인형

오늘은 쉽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외국어의 시간

 

 

날개를 접고 시나브로

시간의 그물을 엮고 있다가

낯선 언어의 미로에 갇혀버렸네

 

같은 음을 반복하는 입술은

혀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고

숲은 뒤에서부터 어둠을 몰고 오네

 

보이지 않는 너에게 가까워지려고

새 신발을 신고 부르튼 발

 

구겨지긴 싫고,

부풀어 터질까 조바심을 내도

지금은 한밤중, 별의 영역이라 저며지는 백지

 

너를 읽지 못해 허둥대다가

서식지를 잃어버리고

씹다가 내뱉지 못해 웅얼거리는 노래

 

빽빽한 숲이 길을 막고 있어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 모르는데

눈도 귀도 다 두껍게 접혀버리네

 

 


 

도서관 가는 봄날

 

 

햇볕이 좋아 도서관을 간다

 

걷다가 무료하면

공원을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햇볕 쬐기도 하지만

어떤 일 같은 일이 없어서

봄날 하루해는 길다

 

지나온 길은 길지 않았고,

앞으로 남은 길은 예정됨이 없어서

여기까지는 아직 아닌데 싶다

 

얇은 시집 한 권 펼쳐보는데

멀리 있는 자식 같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만

내용은 여전히 건너편에 있다

읽던 책을 덮고 몇 권을 대출한다

 

이 따스한 봄날, 가슴엔

나와는 상관없는

불안의 책*들로 가득 차버린다

 

---

* 페르난두 페소아 : 불안의 책.

 

 


 

고백

 

 

이제야 고백하지만 그건 내가 들을 말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머뭇거리다 놓쳐버리고 만 말들이 파도를 타고 씻겨간 해변에 소문과 함께 떠돌고 있었다

 

소라 귀가 휘파람 부는 것도 순비기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도 어쩌면 어디에도 머물 수 없었던 불안한 내 발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사막은 인디고블루의 하늘빛 아래 붉은 모래 바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쏟아지는 별을 심는 가슴이 되고 싶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오아시스 같은 샘도 품고 싶다

 

몰아치는 모래바람이 새로운 언덕을 세우고 낙타는 유유히 그 사막을 건너간다

 

가만히 있어도 물결은 밀려온다. 퍼지고 번지고 젖어온다.

 

오늘은 섬 같은 곳에 가만히 서서 내일은 사막 같은 곳에 처연히 서서 실어증 환자처럼 중얼거리고 있다.

 

그건 네게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정말 네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수선화

 

 

꿈속에서만 운다

아이 때문에도 울고

보이지 않는 얼굴 때문에도 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혼자 찾는 방

 

물에 비칠 하안 소녀의 얼굴만 생각한다

 

겨울 소나기에 봉오리는

비탈 아래쪽을 향해 눕는다

 

꽃을 피우지 못한 수선화는

산부추도 아니다

 

계절이 다 지나가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수선화,

 

잎 넓은 털머위가 부럽다

 

 

         *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

                       * 사진 : 청미래덩굴 열매(망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