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1)
♧ 화성, 어디쯤에 이르러
어느 하늘 아래 그림자 깊어지나
벽과 벽 사이 천 길 벼랑 갈라놓았던
빈 틈새 알아챘을까, 두려움 깊었을까
파란만장 나부끼는 아비의 길을 밝혀
행궁의 길 이르러 뜨거운 맨발이거나
흙바닥 낮게 엎드린 백성의 미음이거나
품에 든 아들로 하루여도 오죽 좋았을
간절히 부르는 노래 온 세상이 받들어
그 이름 성군이라 답하는 초록 숲 그늘 짙다
♧ 반가사유상
텅 비어 흐르는 몸
어디쯤에 임하시나
그윽이 바라보는 무한 우주 티끌 하나
입가에 맴도는 미소
사람이라, 사랑이라
♧ 작은 신
운동화는 넉넉히 너를 향한 발걸음에
어찌해 빛나는 길, 되레 멀리한 구두는
가만히 돌이켜보니 티끌만 한 흉터였다
외삼촌 육지 선물, 볼이 좁아 욱여 신다
발가락 곪은 줄도 모르고 며칠째
기쁨도 벌겋게 그만, 벗어 든 처음 구두
애석히 놓지 못해 뒤뚱이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놨다, 선반에 올려놓고
아무리, 봐도 한 뼘 발 또 그렇게 작은 신
♧ 마중
바람이 때리고 간 얼굴도 얼굴이지만
부르튼 손 감추려 수세미로 문질러
벌겋게 오르던 핏발 허리춤에 감추고
얼었다가 녹았다가 막 틔운 어린잎에
이제 그만 돌아서려 추적대는 싸라기눈
벗을까 더 껴입은 옷 매번 망설이는 나
♧ 울음의 진원
그 속울음 이러할까 용솟음치는 울돌목
군주마저 시기한 덕목은 무엇일까
판옥선 매어둔 칼이 울음을 가른다
뭇사람들 안위에 오직 볼모로 나선
살고자 했을까, 나를 향한 믿음에도
온전히 딛고 선 바다 엄습하던 한 가닥
북소리 아득히 열두 척 배의 승전도
‘기억을 지운다’ 휩쓸려 가버린다
뒷모습 힘을 보태도 저 시름 이슥 깊다
*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