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6주년 추념시집'의 시(2)
♧ 어느 먼나무로부터 – 고영서
꽃의 기억은 없었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내려오던 길
삼삼오오 걷던 우리는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알아봤다
면사무소가 읍사무소가 되고
시청이 되고 자치 경찰대가 된 마당에
한라산에서 옮겨와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
국군 2연대 1대대가 주둔할 때
무장대 토벌을 마친 기념으로 심어진,
나무로는 드물게 벼슬까지 오른
먹낭 개먹낭,
생명에 좌우가 어디 있나
너무 많은 열매를 지탱하느라
가지가 휘었다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우리는
영 살았수다
오래 살아줍서
먼나무 꽃말은 기쁜 소식이라며
♧ 사라지는 사람들 - 고영숙
섬에 걸어 놓은 수평선을 접었지
접힌 자국마다 그늘진 절벽이 되는데
수직의 몸들이
경사면으로 기울어 쏟아지는 사람들
점선 안으로 돌이 날아오고
펼쳐진 사람들은 자국이 남고
짧은 봄날이 여러 번 겹치면
깨진 꽃잎에도
종종 몸을 부딪치는
다친 사람들이
닫힌 사람들이
말없이 모서리에 닿아 있어
너무 투명해 뼈가 다 비치는
점선 밖을
걷는 사람들은 뒤돌아보겠지
숨죽이지 않고도 멀리 와버린 검은 하늘을
붙잡지도 못했는데
끌어안지도 못했는데
들쭉날쭉 모여 있다가
접힌 채로 뒤척이는 사람들
접고 나면 흐릿해지는 사람들
한번 달아나지도 못하고
한번 일어서지도 못하고
깃털 같이 쌓여가다
차곡차곡 접혀 사라지겠지
♧ 백비(白碑)를 바라보며 - 권화빈
저건 다만 깎아놓은
한 덩이 돌이 아니다
그냥 반듯이 누우니 있는
한 개 돌덩이가 아니다
저건 저건 말이다
아직 누군가 숨 쉬며
턱턱 내뱉는 숨소리다
지금도 뚝뚝 흘리고 있는
누군가의 슬픈 눈물이다
아직도 감지 못한
그날의 붉은 눈동자다
아니다 아니다 저건
한라산 통곡소리다
아직도 못다 한 서귀포 앞바다
다랑쉬 동굴의 한 맺힌 절규다
슬픈 그날의 함성이다
쟁-쟁-쟁
오늘도 내 귀에 대고 포효한다
단 1초도 잠들지 말라고
단 1초도 그날을 잊지 말라고
지금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아, 저건 저건 말이다
누군가 누군가 깨다 만
한가한 도공(陶工)의 한 덩이 돌이 아니다
♧ 열매와 뿌리 – 김경훈
-요즘의 4․3을 보며
당신은 봄을 즐기는가
혼신을 다한
뿌리의 악력이
산 물을 밀어 올린 것이니
가지와 잎이 악착같이 버텨
꽃은
피어나는 것이니
달디단 과즙 속엔
전신을 돌던 피의 땀이
애잔히 스며 있는 것이니
겨우내 죽을힘을 다 한
기력들이 남아
봄은 오는 것이니
그래도 당신은 열매를 탐하는가
♧ 영웅 - 김규중
1.
명포수로 동료들을 결집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백두산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는
말년에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수위로 일했다
2.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4․3 당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근무하다
예비검속인들을 처형하라는 명을 받고
부당하므로 불이행하여 100명 넘는 사람들을 살린
문형순은
말년에 제주 대한극장 매표원으로 일했다
3.
홍범도는 조국 독립 두 해 전에
문형순은 군사정권 때 숨을 거두었다
홍범도 흉상은 독립 영웅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되었고
문형순 흉상은 경찰영웅으로 제주도경찰청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홍범도 흉상은
다시 만주 벌판으로 망명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제주4․3 76주년 추념시집 『수평선 접힌 자국마다 그늘진 절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