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3)와 가을 들꽃

김창집1 2024. 11. 17. 01:38

 

 

할머니의 단말기 인식법 박동남

 

 

신분증과 교통카드가 있는 패스를

목에 건 아가씨들이 버스를 탄다

가슴을 갖다 대니 단말기 인식 완료

좌석에 가서 앉는다

 

단말기에 가슴을 갖다 댄다

소리가 안 나고 인식이 안된다

몇 번을 갖다 대 보더니

내가 늙디늙어서 젖퉁이가 쭈글거려 그렁갑소

소리가 안 나 분당께요

 

투덜거리며 계속 갖다 대니

운전기사가 하는 말

할머니 소리가 안 나도 좋으니

위험하니까 제발 그냥 가서 좌석에 앉으세요

 

 


 

낙엽 재테크 - 박부민

 

 

빗방울 때리자 나무들이

부쩍 가난해진다

 

발 앞에 수북이 내려놓고

무상으로 다 가져가란다

 

버리면서 봄날의 새 양분을 축적한다니

향긋한 재테크가 촉촉하구나

 

바람이 골목골목 그 선물을 나누는 동안

겹쌓인 허욕도 잔고 없이 쓸어 내고

 

황금빛 한 장, 홍옥빛 두어 장

고개 숙여 빈 주머니에 적금한다

 

어둡고 쓸쓸한 날 성냥불 켜듯

가난한 시인이 시린 손으로 빚어

 

장독대에 소복이 올려 둘

새하얀 첫 시집 책갈피로만 투자하련다

 

 


 

무릎 박홍

 

 

  무릎을 누르면서 그녀가 입을 딱딱 벌리고 있다

  그 소리 없는 비명에 나는 죄를 진 사람처럼 곤혹스럽다

  연골이 닳았다고

  너무 많이 걸었다고

  나도 아는 그녀의 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못골에서 붕께로 연지에서 적기로

  거미줄 같은 길을 그녀는 걸어 다녔다

  어떤 날은 솔가리를 걷어 오고

  어떤 날은 생선을 걷어 오고

  어떤 날은 쌀과 채소를 걷어 오고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동네 고샅길을 돌아 나오는 그녀의 행상이

  내 가슴에 거미줄을 만든다

 

  병원을 전전하더니만 며칠 전부터는 산 약초를 짓찧어서 무릎에 붙였다 마늘도 찧어 붙이고 생강도 찧어 붙였다 피부가 짓무르면서 둥글게 부어올랐다

  걸어 다닐 수가 없으니

 

  굶지 않고 사는 것이 모두였던 그녀의 세계가

  이제 거미처럼 길고 앙상한 다리로 남았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르고 산 그녀의 길이

  둥그런 지구 위에 거미줄처럼 깔렸다

 

 


 

어느 날 오후의 오수 배한조

 

 

음악을 들어 볼까, FM 방송

세상사를 다 아는 듯 설레발치는 진행자의 군소리

원음은 깨지고 소음이 된다.

 

신문 지면을 덮은 온갖 누추한 기사들이

남의 정사를 엿본 것처럼

뒷맛이 찝찝하다.

 

돌고 있는 시침을 잡고 늘어지거나

아니면, 몇 바퀴 더 돌려놓고 싶은데,

해는 연자방아처럼 꾸역꾸역 돌고 있다.

 

창문 밖의 참새들은 신혼 잔치를 하는지

창 안의 존재는 어느 묘지의 망두석인 양

거리낌 없이 제 할 짓 다 하고 있다.

 

세상의 일들이 채탄하는 광부처럼

머릿속에 깊은 동굴을 만들어 쑤셔 대고,

심장 박동은 이미

내연기관의 피스톤 속도를 능가하여

벌겋게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다.

 

숨 한번 크게 쉬고,

눈 한번 감았다가 뜨니

해는 서산마루에 걸렸는데,

창밖에는 또 다른 놈들이 잔치를 하나 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새벽 바다 - 백수인

 

 

  어둑어둑한 공기를 가르며 당신에게로 가네

  벌써 잠 깨어 있는지 어디선가 밭은기침 소리 들리네

 

  새벽이 당신을 부르는지 당신이 새벽 부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형상은 아스라하고, 아득하고 애잔한 소리들만이 모래밭과 뻘밭 사이를 배회하네 희미한 시공간의 경계를 바라보면 비로소 새벽의 빛깔이 꿈틀거리는 게 보이기 시작하네 선연한 쪽빛이 점점 엷어지네 벌겋게 불타던 가슴이 한고비 넘으면 연분홍빛 낭만의 시간을 휙휙 휘감네 어디선가 은빛 회오리가 일어나 검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이네

 

  그게 당신이 나를 맞는 방식이라는 걸 알았네

 

  검으면 검은 대로, 붉으면 붉은 대로 모든 구름을 가슴으로 받아 안듯이, 소낙비거나 가랑비거나 내리는 건 모두 두 팔로 끌어안듯이

 

  당신의 집 사립문을 닫고 돌아서면서 문득 깨달았네 나는 당신의 모습을 본 게 아니라, 당신의 손가락 아래 드리운 새벽의 빛깔을 만났다는 걸

 

 

        * 월간  우리』  11월호(통권 437)에서

        * 사진 : 가을 들꽃 차례로 한라돌쩌귀 물매화 산국 칼잎용담 둥근잎유홍초 자주쓴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