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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4)

김창집1 2024. 11. 21. 00:27

 

 

책 읽는 불꽃  백승보

     - 독서 모임

 

불의 혀가 나무를 무섭게 핥는다

 

탐욕스러운 불꽃

새까만 숯덩이가 되도록

겹겹의 나무를 통째로 삼킨다

 

공기에 섞인 버얼건 불의 핏자국

놀란 어둠도 더 깜깜해지고

 

손을 뻗으면 닿을 열기의 축제

나는 까맣게 타들어 간 나무의 문자를 손으로 더듬는다

 

내면을 삼키는 검은 문자의 나열들

그 나열을 줍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각자 나무가 되어 자신을 태우고 싶은 사람들

태워서 소멸의 완성을 보고 싶은 사람들

 

눈빛 하나하나 속에

각자의 언어가

불꽃으로 담겨 있다.

 

 


 

즐거운 식사 - 성숙옥

 

 

산그늘이 희끗희끗 색을 품는 계절의 문 앞

내려온 햇살이 역광으로 풀잎을 세우는 것을 본다

마음의 간격에 쌓인 먼지를 하얀 입김으로 불어 내며 걷는데

깍깍거리는 까치들 나무 속 붉은 감을 붙들고 있다

흥겨워진 나뭇가지가 새소리에 몸을 비틀고

날개와 부리가 바쁜

허공이 흥겹다

가을이 펼치는 만찬 속

부리의 화음은 투명하다

새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격의 없는 모습인데

내가 마음 쓰며 배운 것들은 장식으로 남을 것인가

시간에 갇힌 인격이

거기 스민다

어느새 나는

까치들이 건네는 흥겨움을 감탄을 흘리며 받아먹고

 

 


 

숙제 오형근

 

 

어렸을 때는 숙제를 해 놓으면

잠도 잘 잤는데,

 

이제는 숙제를 내주는 사람도

숙제 검사를 하겠다는 사람도 없지만

 

내가 숙제를 내고

내가 숙제 검사를 하는데,

 

원하는 만큼 했어도

그때처럼

편하고 개운하지 않네

걱정이네

 

 


 

어족 숙명론 - 우정연

 

 

절집 처마 끝에 걸린 물고기는 경을 읽고

초가집 정제 앞에 걸린 물고기는 뼈도 못 추린다.

 


 

그외다수 - 유정남

 

 

성은 그

외다수는 이름

숨 가쁘게 달리면 아!

라고도 부른다, 가끔은 여기요로

지나가는 저기요로도 불린다

어둠은 시나리오의 뒷장

스포트라이트는 닿을 수 없는 지대다

숨겨진 꼬리에 물을 주어도 목소리는 자라지 않는다

배역은 번개로 갈아입고

줄어든 그림자는 양말짝처럼 벗어던진다

대기실 못에 걸린 옷걸이가 소금바람에 나부낀다

행인 1, 행인 2, 보름달 실은 라이더였다가

말 엉덩이로 변신하는 밤

다른 뒤편에 코를 박은 외다수가

눈보라 박차며 빙하기의 무대를 지나간다

꽃의 걸음을 따르는

봄은 그를 한 번도 관람하지 않았다

흰 머리칼이 깃털로 지고

외다수는 처음 주인공이 된다

검은 상자 짊어지고

북두칠성으로 떠오르는 혼불

별 부스러기가 극장가의 뒷골목에 흩뿌려진다

 

 

                          * 월간 우리11월호(통권 제437)에서

                                     *히말라야산맥의 봉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