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종 시집 '만나자'의 시(4)
♧ 살아남은 자여
갑오년에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여! 공주에서 상주에서 금구에서 석대벌에서 살아남은 자여! 일제는 그들을 동비라고 했다 봉기에 봉기를 거듭하면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여!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에서 살아남은 자여! 추위와 기아에서 재귀열병에서 살아남은 자여! 국방군은 그들을 공비라고 했다 반제에 반제를 거듭하면서 출몰에 출몰을 거듭하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여!
제주항쟁 산사람이 되어서 살아남은 자여! 예비 검속에서 소개령에서 중산간에서 살아남은 자여! 토벌대는 그들을 역도라고 불렀다 반대에 반대를 거듭하면서 은신에 은신을 거듭하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여!
80년 오월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여! 공수부대의 만행에도 헬기 사격에도 도청진압작전에도 살아남은 자에. 신군부는 그들을 폭도라고 했다 타도에 타도를 이어가면서 사수에 사수를 이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여!
죽지 않고 살이지
죽은 자의 입이 되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여!
♧ 변, 임을 위한 행진곡
정부가 말한다
제창은 안 되고 합창을 해야 한다고
국민 통합을 위하여 합창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모두가 함께 부르는 제창이 왜
국민 통합을 가로막는지 모르겠다
가해자가 말한다
제창은 안 되고 합창을 해야 한다고
그들만의 세상을 위하여 합창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모두가 함께 부르는 제창이 왜
그들만의 세상을 가로막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말한다
산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불온하다고
잉걸불을 삭히기 위하여 합창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가 어떻게
잉걸불을 삭힐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가해자가 말한다
죽은 자를 기리는 노래가 불편하다고
과거를 지우기 위하여 합장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가 어떻게
과거를 지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제창이나 합창이나
임을 기리는 노래일 뿐인데
저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는지
누구는 시험에 들게 하고
누구는 시험에 빠지게 하는지
♧ 청년 신영일
-광주 5월의 들불열사
갑오년 배들평야 태우던
그 불씨 사르고 살려
들불야학 열었던가요
미완의 4월에 껍데기는 가라고
그 외침들 기우고 기워
유신 독재의 사슬 끊어냈던가요
80년 5월, 초토의 땅에서
그 주검, 그 진실 알리고 알려서
6월 항쟁의 깃발 들었던가요
눈 먼 자들의 눈이 되어서
아픈 자들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서
노래가 되어서 횃불이 되어서
배앗긴 민주주의 되찾아 왔던가요
살아서는 민중의 방패로
죽어서는 민중의 창으로
외로운 씨앗이 되어서
더디고 더딘 세상 다시 사시는가요
높이 나는 새가 되어서
높이 나는 지표가 되어서
5월 영령들의 입이 되어서
당신, 청년의 모범이었던가요
♧ 대구에서 광주를 말하다
1946년 10월 1일 대구는
미군정의 실정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총파업 투쟁을 벌였지
공장 폐쇄와 해고 반대, 임금 인상하라고 민주인사 석방하라고
시민들도 부정으로 몰려들어 배고파서 못 살겠다고 쌀을 달라고
농지 개혁 단행하라고 양곡 수집 중지하라고 요구했지
그 후 34년이 지나서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지
용봉에서 충장에서 금남에서 신군부의 야욕을 폭로하며 시위를 벌였지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민정 이행 약속 지키라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10월 2일 10시
대구역 군중집회에서 경찰의 총격에
격분한 대구는 시신을 메고 피의 대기를 받으라고
대구역에서 공회당, 노평을 거쳐 경찰서로 행진했었지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서장의 항복을 받아내었지
그 후 34년이 지난 광주에서
계엄군이 전남대 정문을 막아서고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했었지
계엄군이 착검을 하고 장갑차를 몰고 다니면서 시민들까지 총칼로 학살했지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하여 각목과 쇠파이프로 계엄군과 맞섰지
차량 시위가 벌어지고 시위대가 불어나자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민들이 쓰러졌지
10월 2일 14시에
대구의 거리거리 친일파 단죄하라고 미군정 타도하자고
돌을 던지고 주먹을 휘두르며 경찰벽을 넘어서다가
총기가 난사되어 수십 명의 시민들이 쓰러졌지
그 후 34년 뒤에 광주에서
시위대도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하기 시작했지
도시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이지고 계엄군이 광주 외곽
으로 철수했지
계엄군은 광주로 통하는 도로와 전화, 통신을 차단하여 광주를 봉쇄시켰지
하지만 광주는 주먹밥을 나누면서 범죄 하나 없는 해방구를 만들었지
10월 2일 19시에
대구에서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들을 구타하고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했지
친일파가 색출되었고 악질 지주의 집이 털리고
시내 도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져서 피아 사망자가 생겨났지
곧바로 계엄령이 발동되고 미군정이 탱크를 몰아 진압하기 시작했지
그 후 34년이 지나서 광주에서
시민수습위원회가 꾸려지고 계엄군과 교섭을 벌였지
일부 수습위는 총기를 반납하고 연행된 시민들을 넘겨받기도 했지
하지만 계엄군의 주남마을 학살사건이 터지면서
교섭이 깨지고 시민군은 투항파와 투쟁파로 의결이 갈렸지
10월 3일 정오
미군정의 무력 진압과 쌀값 폭등에 분노하여 영천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체국 건물을 불태웠지
구미에서도 시위대가 경찰서를 점거하고 친일파 부호들의 가산을 몰수했지
성주, 고령, 김천, 예천, 영일, 경산에서도 농지 개혁 단행하라고 친일파 청산하라고 일어났지
그 후 34년이 지난 광주는 분수대에서
끝까지 싸우자고 결의하고 새로운 항쟁위를 구성했지
무력 진압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했었지
하지만 신군부는 무조건 투항하라고 최후의 통첩을 보내왔지
항쟁위는 광주 시민의 핏값에 보답하겠다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도청을 사수하며 최후의 항쟁을 벌였지
♧ 527
그날, 광주의 밤거리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자도 끊기고 네온사인도 꺼지고
모두가 정지 화면처럼 멈춰 있었다
그날, 광주의 밤거리는
예측하고 예감하는 것만 남았다
어둠 속에 꼭꼭 숨어서
귀가 커지고 코가 길어나고
예리한 촉수들만 밤마실 나갔다
그날, 광주의 밤거리는
죽음을 기다리는 도시처럼
바람 한 점 들지 않고
꽃 한 송이 피지 않았다
그날, 광주의 밤거리는
부활을 꿈꾸는 도시처럼
새날의 축포가 터지고
대축일의 밀알들이
찬란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그날, 광주의 광주의 밤거리는
* 최기종 시집 『만나자』 (문학들, 2024)에서
* 사진 : 가을 열매들 : 차례로 노린재 구기자 작살나무 누리장나무 남오미자 천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