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3)

김창집1 2024. 12. 26. 00:53

 

 

고야, 세노라 사바사 가르시아의 초상 - 김종욱

 

 

가을 낙엽처럼 물든 갈색 곱슬머리로 가린

이마에 드리운 서늘한 그늘,

유럽의 호린 하늘처럼 짙은 눈동자 속에서

조용한 격정도 감지하지 못하고

점잖은 척 교양 있는 체하는 사람들은

단언컨대 교양의 불구자*일 뿐이다

정신이 늙은 자들

그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모른다

뜨거운 여름 동안의 괴로움

타오르고 사그라들어 재로 식어가는 영혼의 빛을

한 점 티 없이 시린 피아노 소리 울리는 맑은 피부

뜨거울수록 도리어 한없이 차가워져서

만질 수도 없이 슬픈 음악의 굳게 다문 입술을

 

---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귀를 달래다 박구미

 

 

  산수유꽃이 환한 공원을 돌고 도는데

  귀가 막혀서 먹먹하더니

  뿌지직거리는 소리가 나

  눈썹 치켜뜨게 하는데

 

  까만 구멍 속으로 꿈에서라도 듣고 싶은 소리 귀담아듣지 못한 소리 흘려보냈어야 할 소리 눈물부터 나을 소리 한숨 나는 소리 소름 돋는 소리 숨 막히는 소리 간지러운 소리 다정한 소리 그리운 소리 거친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크고 작은 수많은 소리, 삼키지 않고 토해 내고 있다 탈이 났거나 화난 게 분명하다

 

  침묵으로 익어 가는 봄밤

  노랗게 귀 기울이는 중

 

 


 

낙화 송준규

 

 

층층시하 혹독한 시집살이와

칠 남매 건사해 모두 출가시키느라

허물만 남은 새우등

팔순의 충주택 밀차 위에

떠억 버티고 서 있는

말티즈 한 마리

 

수년 전 바람 맞고 쓰러져

성한 곳 하나 없다는데

태워 모시는 대신

지가 타고 다니는 버르장머리

그래도 늠름한 자태 때문에

장군이 이름 얻었단다.

땟국물 쭈르르 흐르는 녀석

함께 산 지 십년이라

사람 나이 칠순에 심장병, 노환 겹처

이젠 같은 노인

 

살기 위해 녀석 태워 운동한다지만

둘 다

치료도, 희망도 끝나고

온 곳 모르듯, 갈 곳 몰라도

환승 열차를 기다리는 듯하다

향기만 남기고 떠나는 낙화

 

시든 한 송이

고달픈 생애가 세월 바람에

구부정구부정 떠밀려간다.

 

 


 

아내 맞추기 민구식

 

 

아내가 입을 열면 나는 귀를 연다.

두 시간 정도는 꼼짝도 않고 들을 줄도 안다.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끄덕끄덕, 맞아 맞아, 그래서 우찌 됐는데?

맞장구를 칠 줄도 안다.

아내가 부르면 발이 먼저 간다. 물론 대답을 크게 한다.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지갑을 바로 연다.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무조건 맛있네라고 크게 대답한다.

몰래 소금을 더 넣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그냥 먹는다.

이 옷 하고 저 옷 하고 어때? 하면

둘 다 좋네 라고 말하지 않고

파란 옷은 젊어 보이고, 분홍 옷은 예뻐 보이네

라고 대답할 줄도 안다

사십오 년을 넘겨 살고서 배운 지혜이다.

 

 

                                  *월간 우리12월호(통권 제43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