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5)
*유리호프스
♧ 위로 받고 싶은 당신! - 정봉기
향기, 빛깔이 있는 언어를 감추고
저만의 눈길로 속삭인다.
반려 식물에 의지하고
반려동물에 기대는
외롭고 허망한 인생이여!
화초와 교류하고
개, 고양이, 앵무새와 소통하는 나머지 삶,
주는 정, 받는 정이 서로 만나
알뜰살뜰,
살맛나는 텃밭으로 가꿀 수 있으련만
단절, 단절, 단절, 단절,
사방이 벽壁이라
위로 받고 싶은 당신.
♧ 옷걸이 – 정순영
수많은 옷걸이들이
행복을 찾아 어디론가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네
여기저기 교회당 십자가 네온 불빛이
이리 오라 눈멀고 귀먹은 옷걸이여
들리지 않아요
보이지 않아요
어느 날
버려져서 낮아지니
하늘의 핏빛 목소리가 들리고
마을 길 저기 눈부신 골고다 언덕에서
벌거벗은 십자가 옷걸이가 은혜의 세마포에 휘감기어 날아오르네
♧ 눈부신 미련 – 조성례
까똑, 비숑, 부욱,
잠들지 못한 새벽을 불러 일으킨다
잠깐의 비명으로 온 우주를 몇 바퀴씩 돌고는
내게 정착하겠다는 알림 음
거절 음은 가르쳐 주지 않은 신에게
할 수 있는 욕은 다 들어 붓는다
우주의 한 점 먼지 같은 나를 만날 때
그들은 나와 마주친 빅뱅의 반짝이는 빛을 보냈을까
청맹과니의 눈으로는 한 점 별빛도 받지 못한
까똑, 비숑, 부욱,
가벼운 피사체도 되지 못한 순간의 만남,
거절 못한 손길은
그 새벽에 폰의 스위치를 누른다
그때서야 빅뱅의 눈부심이 나를 때리고
낮에 점심을 먹자는 단체 문자
작은 별들의 부딪침은 깨어져 버릴 것도 없는
작은 흔들림이었다
♧ 새벽 한 시 – 지소영
속눈썹 닫으며
투명해진 심장에 호흡 늦춘다
많이 힘들었지
접힌 손마디들도 가냘핀다
보글보글 필터링시키는 염색체
비눗방울 끄며
달콤한 생크림을 얹는다
태양광 균열의 가냘픈 정점
트와일라잇twilight 시나브로 그늘 지우고
엇디디며 걸어 나은 노을도 정수하고 있다
엄지손톱이 검지손가락에 감겨
잠이 들면 온유한 꿈을 꾼대요
전도되는 온도 초침들도 아다지오
이십사날개 운영하던
현기증 눕히며
너를 마중물로 부둥킨다
저철분low iron 심실에 비취빛 발아하고
혈소판마다 일(1)로 이입된다
♧ 노후 대책 – 박부민
별 버리고 밥을 얻기로 했다
아니, 별빛을 놓아 주고 밥그릇을 붙들었다
몇 날을 두고 설계한 시선의 상하각이
뼈아픈 회한을 비껴갈 테지만
이젠 눈망울에 별은 뜨지 않는다
무언가 가슴 저리도록 반짝일 일 없고
공원 모퉁이에서 종종 숨죽여
추레하지 않아도 된다
정강이 찌릿한 초조함과
찾은 맨드라미 어깨 같은 서글픔은 멀어져
잔광의 긴장이 차감 공제될 것이다
더는 풀처럼 떨지 않고 떨리지도 않는다
건기와 우기를 섭렵한 바람까지 잦아들면
기대 이상의 함박눈이 울안에 적립되리라
익숙한 지평을 꾸역꾸역 채우며
보장된 안도와 따순 포만으로 덮일 여생
무덤덤하니 무덤 같겠다
♧ 웃기돌* - 민구식
솟구치는 감정,
분노 참지 못할 순간에 허리춤을 잡고
지그시 수면 아래로 잠기게 하는 힘
호린 나의 색을 가져가서 자신의 빛과 섞어
또 다른 색을 창조하고
내 소박한 진동의 작은 자랑을 증폭시켜
세상 살아갈 에너지 넘치게 하고
울리고 물들이게 하는 힘을 가진
간장독의 뜨는 메주를 눌러 된장이 되게 한,
파도 아래서 파도의 뿌리를 잡고
무겁게 닻이 되어
고물에서 묵묵히 키가 된
고마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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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돌 : 간장독에 뜨는 메주를 누르는 납작한 돌.
*월간 『우리詩』 12월호(통권 438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 제주의 길거리 화단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호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