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종 시집 '만나자'의 시(7)
♧ 천왕봉
지리산 천왕봉이
주봉으로 사는 이유는
고도가 높아서가 아니었다
만인이 받들어 모셔서도 아니었다
토끼봉, 형제봉, 반야봉, 상봉, 하봉, 제석봉이며
그밖에 작은 봉우리들, 운무에 가려진 둘레산도
모두가 지리산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서 크기나 높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마다 다름으로 다 함께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 선인장 색이 올라올 때까지
그대 멀리서 발자국 소리
선인장 색이 올라올 때까지
눈을 감고
귀를 씻고
그대 눈 붐비는 벌판에서
선인장 색이 올라올 때까지
손을 모으고
발을 구르고
그대 땡볕 내리쬐는 사막에서
선인장 색이 올라올 때까지
단비를 부르고
낙타를 부리고
그대 이제나 저제나
기대도 인내도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마디풀 담그고
푸른빛 우려내고
내쳐놓은 선인장에 물을 주고
그렇게 색이 올리올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어느 사이에
♧ 진짜 봄
정문을 나서매
눈이 부셔
두 눈을 감아야 했다
막아서던 잔설도
차단막도 물대포도 확성기도 지우매
너도나도 쏟아져 나갔다
우수 경칩이라고
진짜 봄이라고 해방이라고
날날이도 깔대기도 피어 나갔다
저 바람 이이 가고
이 바람 어서 오라고
만세 소리 환청처럼 이어져 나갔다
♧ 이런 고개
우리 사이에
이런 고개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산이 높아서 만나지 못하는
우리 사이에
금패령이라도 좋고
대관령이라도 좋고
덕산재라도 좋겠다
거기 펑퍼짐한 언덕에
봉놋방이라도 하나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모여들어
하룻밤 묵으면서
국밥도 말고 탁배기도 권하고
어디서 왔는지 물어도 보고
이 말 저 말에도 끄덕끄덕하면서
수가 틀리다고 다툼해도 괜찮겠다
술이 올라서 신세타령 늘어놔도 괜찮겠다
밤이 이슥하여 코 고는 소리 요란한
이런 고개 하나
대보름에 불싸움 하더라도
불가뭄에 물싸움 하더라도
자고 일어나면 머리를 조아리면서
내 강이 깊었다고
네 산이 높으다고
고개고개 마주대고
얼씨구 저절씨구 추임새 넣어주는
이런 고개 하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등성이로 이어지는 지름길 하나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진 마음들
이 산 저 산 이 봄 저 봄 만난다면야
산적이 득실거려도 괜찮겠다
호랭이 나도 여시 나도 괜찮겠다
더 큰 마을이 되게 하는 고개 하나
만나서는 덕이 되고 흥이 되게 하고
해어지면 산이 되고 강이 되게 하는
이런 고개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 그런 자유에 저항하라
그런 자유에 저항하라
친구 아니면 적이라고 그렇게
사주하고 압수하고 별건으로 구속하고도
그것이 자유라고 강변하는 자에게
일제가 내세운 대동아 공영의 자유도 갔다
히틀러가 떠들던 독일 국민의 자유도 갔다
세계의 경찰이라는 아메리카 퍼스트도 갔다
저항하라 그런 자유는 없다
저항하라
탐욕과 과오로 찌든 너에게 그에게
행여 똥물 튀길까 저어하는 소시민들에게
남북으로 동서로 세대로 나누고 가르는 자에게
이 땅의 노동자 농민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 땅의 불령선인 파르티잔은 무엇을 바랐을까
이 땅엔 정의도 공경도 상부상조도 사라졌을까
이 땅의 평등 평화도 생명의 외경도 없어졌을까
저항하라 그런 자유는 없다
그런 자유에 저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온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없다
*최기종 시집 『만나자』 (문학들 시인선 032,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