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1)
♧ 자클린느의 죽음 - 이생진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클린느
피카소가 죽고 몇 년 뒤
창문 셔터를 내려놓고
피카소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피카소가 식사하던 자리에 음식을 차려 놓은 채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피카소를
기다리다 지쳐
혼자 홑이불을 쓰고
권총 자살했다
모두 갔다
모두 갔지만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그런 사실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아 있는 듯이 살아 있다
♧ 하얀 나비 – 강동수
평생을 남을 위해 기타 연주를 하던 아버지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들의 노래 부탁을 받고 기타를 들었다
*우∼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
우∼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임인데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아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제 나는 나비가 될래요
하안 나비가 되어 창공을 훨훨 날아 다닐게요
그날 밤 아들은 살던 아파트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아들을 마지막 떠나보내는 날
검은 상복 차림의 여인의 울음과
끝내 오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에게 불러 주던 노래가 하안 나비가 아니었으면…
좀 더 희망적인 노래를 불렀으면…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늙은 기타리스트는 이제 하안 나비를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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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세에 요절한 가수 김정호의 대표곡 〈하안 나비〉의 가사.
♧ 심근경색, 또는 불이 꺼졌다 – 강태승
출근하려 대문을 여는 순간 스위치 내렸다
겨우 오십의 그녀 땅바닥으로 풀썩 꺼졌다
아무리 흔들어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선을 이으려 급히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의사는 “불이 꺼진 집입니다”라고 썼다
그녀의 집은 늘 환해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녀가 들어서면 주위는 저절로 환해져서
악어 고양이 늑대들도 순해지곤 하였다
물푸레나무 줄기를 슬슬 감아 돌던 뱀들도
매미와 여름 한 철 보내곤 하였다
누군가 문득 그녀의 스위치를 내렸다
곧 캄캄해져 버린 그녀의 안이비설신의
툭하면 호시탐탐 노리던 그녀의 몸을
남편은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고
뻔질나게 섞은 체온 식어 버릴 것이다
바위보다 단단하게 캄캄해진 그녀
모든 출입이 막혀 버린 그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버린 그녀
걸어 다닌 발자국마다 피어나던 민들레
명주실 흔하던 입 나뭇잎 펄럭이던 손과 발,
불이 꺼지자 가지마다 주렁주렁하던 열매
누군가 몽땅 거두어 가고 단지 식은
고깃덩이 문밖으로 불쑥 던져 버렸다
횡재한 파리들이 금세 영역을 다툰다
어디에 구더기 쌀지 격렬하게 탐색한다.
♧ 퐁퐁 국화 – 김동헌
숲 시 낭독회를 준비하며
분과 위원장은 바람에 시향을 싣기가
힘에 부친 듯
어느 가을날
퐁퐁 국화 한 아름 안고
국당에서 나를 찾아오셨다
이메일로 접수한
서른 몇 편의 시편詩篇을 인계하며
엔솔로지를 부탁하신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국화 향이 퐁퐁 쏟아 오른다
지금 완연한 가을
갈급한 마음이
바람보다 먼저 가는 곳
송도 바람에 풍등으로 띄운다
오늘, 당신 차례다
♧ 팔십 - 洪海里
어제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일
갑자기 할 수 없는 나이
그게 팔십이라네.
가난하면 가난에게 감사하고
슬프면 슬픔에 고마워하는 나이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고
들리는 대로 듣는 나이
그게 팔십이라네.
*우리시회 간, 월간 『우리詩』 2025.1(통권 제43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