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1)

김창집1 2025. 1. 16. 00:03

*피카소의 '여인

 

 

자클린느의 죽음 - 이생진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클린느

 

피카소가 죽고 몇 년 뒤

창문 셔터를 내려놓고

피카소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피카소가 식사하던 자리에 음식을 차려 놓은 채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피카소를

기다리다 지쳐

혼자 홑이불을 쓰고

권총 자살했다

 

모두 갔다

모두 갔지만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그런 사실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아 있는 듯이 살아 있다

 

 

 

 

하얀 나비 강동수

 

 

평생을 남을 위해 기타 연주를 하던 아버지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들의 노래 부탁을 받고 기타를 들었다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임인데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아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제 나는 나비가 될래요

하안 나비가 되어 창공을 훨훨 날아 다닐게요

그날 밤 아들은 살던 아파트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아들을 마지막 떠나보내는 날

검은 상복 차림의 여인의 울음과

끝내 오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에게 불러 주던 노래가 하안 나비가 아니었으면

좀 더 희망적인 노래를 불렀으면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늙은 기타리스트는 이제 하안 나비를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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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세에 요절한 가수 김정호의 대표곡 하안 나비의 가사.

 

 


 

심근경색, 또는 불이 꺼졌다 강태승

 

 

출근하려 대문을 여는 순간 스위치 내렸다

겨우 오십의 그녀 땅바닥으로 풀썩 꺼졌다

아무리 흔들어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선을 이으려 급히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의사는 불이 꺼진 집입니다라고 썼다

 

그녀의 집은 늘 환해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녀가 들어서면 주위는 저절로 환해져서

악어 고양이 늑대들도 순해지곤 하였다

물푸레나무 줄기를 슬슬 감아 돌던 뱀들도

매미와 여름 한 철 보내곤 하였다

 

누군가 문득 그녀의 스위치를 내렸다

곧 캄캄해져 버린 그녀의 안이비설신의

툭하면 호시탐탐 노리던 그녀의 몸을

남편은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고

뻔질나게 섞은 체온 식어 버릴 것이다

 

바위보다 단단하게 캄캄해진 그녀

모든 출입이 막혀 버린 그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버린 그녀

걸어 다닌 발자국마다 피어나던 민들레

명주실 흔하던 입 나뭇잎 펄럭이던 손과 발,

 

불이 꺼지자 가지마다 주렁주렁하던 열매

누군가 몽땅 거두어 가고 단지 식은

고깃덩이 문밖으로 불쑥 던져 버렸다

횡재한 파리들이 금세 영역을 다툰다

어디에 구더기 쌀지 격렬하게 탐색한다.

 

 

 

 

퐁퐁 국화 김동헌

 

 

숲 시 낭독회를 준비하며

분과 위원장은 바람에 시향을 싣기가

힘에 부친 듯

 

어느 가을날

퐁퐁 국화 한 아름 안고

국당에서 나를 찾아오셨다

 

이메일로 접수한

서른 몇 편의 시편詩篇을 인계하며

엔솔로지를 부탁하신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국화 향이 퐁퐁 쏟아 오른다

지금 완연한 가을

 

갈급한 마음이

바람보다 먼저 가는 곳

송도 바람에 풍등으로 띄운다

 

오늘, 당신 차례다

 


 

팔십 - 洪海里

 

 

어제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일

갑자기 할 수 없는 나이

그게 팔십이라네.

 

가난하면 가난에게 감사하고

슬프면 슬픔에 고마워하는 나이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고

들리는 대로 듣는 나이

그게 팔십이라네.

 

 

               *우리시회 간, 월간 우리2025.1(통권 제43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