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문학' 2024 제15호의 시(8)
♧ 가스라이팅 – 강승 강선종
닭장 속 닭이
감나무 가지 위 까치를 쳐다본다
참새도 찍찍거리며 허공을 넘나든다.
자유와 속박의 경계가
분명한데도
닭은 태연하다.
주인이 가져다주는
모이를 먹으면서
꼬박꼬박 알을 까서 바친다.
아마
가스라이팅이 원지
닭이 안다면
천지가 개벽하겠지.
♧ 돌려놓고 가는 것 – 강연익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인생
한조각 구름에 실려 이리저리 헤매며
이 우주에 얼마나 도움을 받고 살았을까?
이 몸도 나의 생명도 재물도
인연에 의해 빌려다 쓰고 있는 것들
오직 가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차 있지만
아무리 애착을 가지려 해보지만
시간이 되면 다 되돌려 놓고 가야 하는 순리
일장춘몽이 풀잎에 이슬 같이 가야는 곳
시간은 소리 없이 점점 다가오는데
오늘을 가지고 있음에 고마워 하다가
어둠 속 흙으로 사라지지만 봄은 오리니
♧ 새우리 – 김동인
이 새우리 한 단에 얼마꽈
이 말을 들은 주인아저씨, 놀라면서 나를 슈퍼 안으로 잡아끈다.
콜라 한 캔을 꺼내 두 잔에 따르면서 마시라고 권한다.
대뜸 사장님 말씀이 제주도 어디우꽈?
1990년 시드니 번화가 한인 슈퍼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영장이 딸린 저택에서 불고기 저녁을 대접받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새우리라는 제주방언 덕택이다.
♧ 은하수 건너 외할머니댁으로 – 김성주
-옥수수 2
옥수숫대가 긴 팔을 뻗어
아기들이 놀라요
손을 흔들어 다가서는 것을 막는다
겨드랑이에 품긴 어린것들
하늘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밑둥치에 달린 것부터 모두 떼 내어
그 여린 것들을 밭고랑에 내팽개친다
맨 위 하나만 남기고
어스름이 찾아오고
옥수숫대들이 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남겨둔 실한 것들이 영근 날
트랙터를 몰고 밭으로 간다
고랑에 버려진 것들의 마지막 숨결 코끝을 스친다
이 밭주인의 권리로
영글기를 기다렸던 모든 열매들을 부대로 옮긴다
옥수숫대들은 몸서리를 쳤으리라
트랙터로 옥수숫대 제거 작업에 들어간다
옥수숫대는 밭고랑 속 쭉정이들을
긴 팔로 부둥켜안고 흙 속에 묻히며
새끼들에게 말했으리라
엄마랑 은하수 건너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거야
♧ 장한철 생가에서 – 김영숙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던
잔잔했던, 고요했던
쿵 쿵 심장이 떨어지는 음악 소리
그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
그리웠던, 님이 기다리고 있는
꽃 같은 섬 애월 한담
설문대할망님 설문대할망님
나 살려줍서
장한철, 그는 살아야 했다
살아서 돌아와야 했다
차가운 겨울 거친 풍랑을 이겨낸
표해록
스물네 시간 불을 밝히고
정낭은 열려 있다
울컥 쏟아지는 붉은 기운
출렁이는 저녁
걸음걸이는 파도 소리처럼
외롭지 않은
*애월문학회 간, 『涯月文學』 2024 제15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