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8)
♧ 여행 3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잠시
멈춤의 시간만이 있을뿐
여행은 낯섬에서 출발하여
낯익음으로 마무리 된다
나를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나를 세우는 일이다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오늘과 다른 내일의 설렘과
아무 일이 있기를 기대하는 살아있음으로
♧ 여행 4
이제 겨울이면서도
생명력으로 찬란한 봄이 한 쪽 땅에 가득하다
들판에는 하안 볏짚 마시멜로가 생각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어디 찍고 가야 할 곳이 없으니 오히려 좋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있으니 참 좋다
세련된 커피숍도
이름 있는 명승지도 많지 않아서 더 좋다
선택지의 고리가 사라지니
시간의 자유 감각이 자유롭게 내 몸 속에 들어오고
그저 너른 들판은 심심한 공간을 만들어
잠시라도 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나
절로 그렇게 됐다
♧ 소금산 출렁다리
소금산 출렁다리 위를
무거운 땀과 같이 걷다보니
물기 빠진 낙엽 하나
잡힐 듯 바람 따라 흐른다
지금쯤이면
나또한
물기 사라진 낙엽이 되어
구름처럼 이 골 저 고을 넘나들고 싶은데
나는
지난밤 먹은 술과
되씹었던 안주와
살아온 삶이 뒤엉켜 출렁대며 넘는다
저만치
보이는 노란 울렁다리에 닿기를,
석벽에 박힌 잔도를
무심코 걷는 것만으로 잠깐이나마 낙엽이 된다
♧ 주왕산 가을
시월의 끝자락, 무심코 떠난 어느 날
주왕산 가을에 오르다
단풍이 곱다
참 곱게 물들었다
공휴일이 아닌데도
초입부터 울긋불긋하다
물든 사람이 많기도 하다
참 많은 사람들이 물들고 있다
좌판 아낙네는
썰어놓은 사과 한 조각을 권하고
마을 촌로는 당신의 가을걷이로
한번은 삭정이를 지고
한번은 쭉정이를 안고
쉬엄쉬엄
겨울을 나려하고
나는 혼자서
두 사람의 밥을 시키고는
주왕산 산자락에 걸린 황금빛과
그 닮은 사과 막걸리에게
쉬엄쉬엄
대화를 건넨다
♧ 그 꽃, 그 이후
올라갈 때
골에 서면 산등성이만 보이고
산등성이에 서면 골만 보였다
내려와 보니
안에서는 벽만 있더니
밖에서는 하늘이 있었다
그 꽃, 이후
멀어서 유채밭으로 보이던 것이
가까울수록 유채꽃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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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의 「그 꽃」을 원용함.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 (月刊文學 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