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현문학' 2024, 제9호의 시(2)
♧ 달과 어머니 – 김춘기
아파트 피뢰침 위에 앉아 있는
핼쑥한 상현달
날마다 불러오는 배를 안고
하늘 계단 오른다
아들 전화 한 통화에도
웃음이 보름달 같던 어머니
난소암 재발 후
침대가 그녀의 식탁이고 화장실이다
통증이 지네발처럼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배
형광등 하나 켜 놓은 병실에서
나는 무릎 꿇고
복수 차오르는 달을 밤새도록 쓰다듬는다
심야 강변북로, 경적 앞세운
구급차가
시간을 압축하며 어둠을 가른다
팔목에 야윈 가슴에
면발처럼 수액을 달고 있는 어머니
팥죽빛 오줌이
투명주머니의 눈금을 읽는다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손가락
장작처럼 굳어지는 허벅지
반쯤 막힌 목구멍으로 삼키는 하안 신음
창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복수처럼 흥건하다
반달이 만월에 가까워질수록
온기 없는 침대 위에
고요만 한 장씩 내려앉는다
♧ 도깨비 소나기 – 양순진
고양이가 뛰어오르자
마음의 일기예보는 불한당처럼
비를 엎지르고
마악 정류장 지날 때 쏟아진 소나기는
걸어온 지난 삶을 송두리째
적시고도 너털웃음 웃는다
몇 번이나 퇴짜 맞았는지
사랑의 이력은 물도깨비가 먹어버려
사랑의 터널에서 맛본 슬픔과 아픔 따위
지나가는 개가 물고 가버렸으면 좋겠어
흉흉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번졌지만
세상이란 그런 것이라 참아내는 법도 습득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맞는 소나기 주사쯤으로
해독하곤 했지
자고 나면 일 킬로씩 불어나는
고무풍선 몸 위로 구름이 춤을 춘다
개미가 원인이라는 엉터리 일기에보
끓어오르는 분노를 빌미로 한 장 가득
밀렸던 시를 쓴다
아니 잠수했던 한 생을 끌어올린다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사랑도 증오도 없는 빈 깡통이
시시껄렁한 오물들과 노닥거리며
파랑을 꿈꿀 수 있을까
서귀포에서 성산으로 가는 어니쯤
강원도 춘천에서 김포로 가는 어디쯤에서
강수량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다량의 슬픔을
수면제처럼 복용했던 기억이
시를 끌어내는 원동력이라면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다
시라는 도깨비와 한바탕 끌어안고
잃어버린 봄을 노래하고 싶다
♧ 육십, 그것에 대해 – 현달환
내 나이 육십이면 어떤 얼굴일까
정거장 없는 발걸음이 멈춰질까
태어나 마른 꽃잎들이
땅바닥에 짙게 물들인
날마다
어쩜
사는 게 고달프지 않을까
꼭 같진 않겠지만
육십이란 그 매듭에
머뭇거리며 벅차게 목이 멜까
오히려 한숨 쉬는 날이 많아질까
점점 목이 길어지는 태양을
똑바로 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쉽게도 설령 두려운 숫자는 아닐까
혹여나 육십이란 두터운 모작에 걸터앉아
쉬고 있으면 잃어버린 여유가 마냥 찾아올까
육십이란 나이를 풀어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진정 아름다운 생이 보일까
육십,
아무것도 준비 없이 들어가다
제 발걸음에
넘어지고 쓰러지면
한 동안 일어나지 못할까
아니,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까
육십,
점점 꼴값할 나이
저기
점점 배시시
다가온다
♧ 그냥 살자 - 홍미순
너를 볼 수가 없었다
삼나무 숲
숲속은 우울했고
보이지 않는 파도 소리 부서진다
거대한 나무들이 빛의 행로를 차단했지
그림자는 늘 나를 감싸고 돌았어
가지에 걸려 함부로 내리지 못한 창백한
얼굴이 돌아서던 길 어둠은 찾아왔지
하나둘 베이지고 쓰러지는
민둥산
숲이 사라지고 너를 볼 수 있었지
오랫동안 기다린 너는
바다를 향해 돌아누워 있더군
그런데, 말이야
벌거숭이로 너를 보게 되었단 말이지
돌아보지 마
봄이 되면 초록 옷을 입고 너를 볼 거야
돌아보지 마
무성해지는 옛 생각
힘들었어
낙엽 지듯 내 모습은 변해갔지
반세기를 살아냈으니
용기는 잡초처럼 자라나더군
잠깐 만나자
시간이 쌓이면 숲이 되지
부서지는 파도 소리 보여
그냥 살자
* 대정현문학회 간, 『대정현문학』 (통권 9호, 201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