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5)
♧ 벌레의 행적 – 임미리
등 굽은 어머니 밤실에서 주어 온 알밤을 뒤적이며 벌레 먹은 밤 고르는 비법을 아느냐고? 흰 똥이 밖으로 나와 있으면, 그 안에 벌레가 살고 있다고, 똥만 밀어내고 밤 속에서 숨 막히게 산다고 하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벌레는 참 영리하다고, 그 발견이 한없이 신기한 어머니, 벌레 먹은 밤 고르기는 아주 쉽다고 하는데, 세상사 모든 일에 어두워도 다 보인다고 들리네
똥만 밀어내는 벌레 이야기 들려주느라 겨울밤은 달의 뒷면처럼 비밀스러워지고, 시린 하늘 찬 서리 내려도 아침은 또 적요하게 스미네
아무리 아닌 척 경이로운 척해도 어머니의 경전이란 그물에 걸리면, 미물인 벌레의 행적처럼 나의 흔적은 감출 수 없으리, 원죄의 은밀함 위태롭기만 하네
♧ 지겹지 않겠구나 – 장성호
잎사귀들아
너희들은 삶이 지겹지 않겠구나
사계절마다 생성과 긍정을 반복하니 말이다
삶의 일부인 죽음 또한 그렇겠지
너희들의 삶의 비결을 알려 다오
공짜 점심은 없지만
그대에게만 알려 드리지요
우리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관장하는 것은
신이 아니지요
바로 저 대지에 깊고 넓게 뻗은 뿌리지요
뿌리는 땅속의 정기를 모으고
젖과 꿀이 흐르는 샘물을 찾아
저 높은 가지 끝까지 보내 주지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같지요
♧ 감나무 아래에서 – 정형무
감 쳐다보며
감 떨어지길 기다린다
익은 감이 떨어지는 건 필연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어서
두 손 내밀어 버티는 일은 어리석기만 하다
그래도 내 벌린 입안으로 떨어지면 안되나
안될 것도 없지
지구가 무너지지 않는 한
벽공에 뜬 주홍시는 반드시 땅에 닿을 테니까
피둥한 몸 움직여 기어오르거나
간짓대 끝 갈라 한 가지 부러뜨릴 수도 있겠지만
고개 한껏 젖힌 채 못내 못내 기다린다
고욤나무의 사생아인 감나무도
까막까치보다 열등한 나도
참 고집이 세다
♧ 늘보원숭이 – 한인철
나뭇가지에 매달린 늘보원숭이를 바라보다가
동작 하나하나가 저렇게도 느려서야
적자생존의 정글을 어떻게 해쳐 나왔을까.
그 수수께끼
하루는 시골에 계신 홀어머니를 찾아서
닭다리 훈제 하나에
통닭 다리 하나를 잘게 잘게 썰어서 종기에 담아
저녁 겸상에 올려놓고 마주 앉아 물었다.
어머니! 구십여 평생에
저처럼 이렇게 닭다리를 통째로 뜯어 봤어요?
고개를 소리 없이 저으신다.
아! 돌이켜 보니
난 이 한 동작을 이루는 데
70년도 더 걸린 늘보원승이 왕이로소이다.
♧ 시비詩碑 - 홍해리
저 크고 무거운 걸
어찌 지고 가려고
가벼운 시 한 편
그게 뭐라고
무거운 돌에 새겨
세워 놓았나
“늬가 시를 알아?” 하고
큰소리 칠 시인이 없네.
*월간 『우리詩』 1월호(통권 43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