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9)
♧ 각골난망
-서각 전시회에서
어느 집 마루, 뒤주, 문짝
세월의 때를 닦고 닦아
거기에 또다시 시간을 새겼다
느티나무면 어떻고 벚나무면 어떠리
옹이진 소나무도 좋고 귀 삭은 이름 모를 나무도 좋다
그저 오랜 세월만 있으면 좋다
묵은 흔적을
살점처럼 지워내고 걷어내
마침내 드러낸 제 뼈
닳고 닳은 속살 무늬 조각
칼을 대고 힘주는 오늘의 조각
사무쳐 잊지 않기 위한 글 한 조각
어느 집 소반, 궤짝, 서안
새기고 새겨진 세월
거기에 또다시 시간을 넣는다
♧ 그들은 속솜
4월이 열리는 그날
총소리 두어 방
‘탕 탕’
무엇 때문인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은 뛰었다
생각 없이
총소리에서 멀리만
그러다 숨어 생각한 게
낮에는 바다로, 밤에는 산으로
낮에는 해 신에게 밤에는 달 신에게
그렇듯 그들은 귀의했다
몇 밤이 지나자
왜 산으로 갔냐며, ‘탕’
왜 바다로 갔냐며, ‘탕’
이레 화륵 저레 화륵*
이 궤에 곱앙 속솜
저 곶디 곱앙 속솜
지금도
어느 좁짝흔 궤 어느 빌레 곶디 곱아서
그들은 속솜
검은 돌 하얀 글로 새겨진
봉개동 237-2번지*에서도
그들은 속솜
---
* <제주어 풀이>
…전략…
*이리저리 바삐 왔다갔다
이 바위굴에 숨어서 입 다물고
저 숲속에 숨어서 입 다물고
지금도
어느 좁은 굴 어느 돌무지 숲속에 숨어서
그들은 입 다물고
…후략…
*봉개동 237-2번지 : 4․3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 기념공원인 제주 4․3 평화 공원이 있는 곳.
♧ 나를, 묻는다
삶의 회한이
함께
번져가는
저물녘 하늘
날개가 퇴화하고
대신
두터워진 발바닥으로
겨우 땅을 짚고선 채
초가들이 조개들처럼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옛 마을을
눈에 담아 묻는다, 나를
♧ 금강산, 발자국 둘을 거기 두고
1
비와 바람,
끊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깎여 만들어진 일만 이천 봉, 끝 봉우리 구선봉
바둑 두는 신선은 바둑판을 버려두고 영랑호에나 가 있는가
목란다리 양지다리 금수다리 만경다리 흔들다리 건너 관폭정
얼어 굳은 구룡폭포의 흐르던 물은
어디로 숨죽여 있는가
내리지 못해 하늘로 솟았는가
길 바꿔 상팔담에 오르니
눈에 들어오는 봉봉마다
날렵한 협객의 감추어진 단검을 꽂아
하늘을 찌를 듯 솟았지만
매양 상처가 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푸르게 우거진 숲과 언덕들이었다
품에 안긴 나그네의 깊은 탄식이었다
2
제 모습 드러내지 않으려 숨은 골처럼
들어 마신 한숨은
아름다움하고 상관없이, 불타올라 식힐 곳을 찾아
해금강에 이미 마음은 닿아 있는데
돌아보고 돌아보고 돌아보고
삼 일을 쉬지 못해 흉내 내어
세 번을 눈 떠 다시 보니 삼일포인 걸
모두 얼어버린 금강산하,
모두 굳어버린 삼일포
그 속의 자태를 그 뉘가 알까마는
그래도 나그네의 입은 닫히지 않고
하염없이 탄성만 나온다
안경 끼지 않은 병사를 뒤로 하고
안경 낀 초병의 모습을 보니
이제 남측출입사무소 땅
뭘 가지고 왔냐고 물으면
나는 단지 얼마 없어 없어질 눈 위에
찍힌 발자국 둘을 거기 두고 왔다고 대답하리라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