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9)

김창집1 2025. 2. 3. 08:47

 

 

각골난망

    -서각 전시회에서

 

 

어느 집 마루, 뒤주, 문짝

세월의 때를 닦고 닦아

거기에 또다시 시간을 새겼다

 

느티나무면 어떻고 벚나무면 어떠리

옹이진 소나무도 좋고 귀 삭은 이름 모를 나무도 좋다

그저 오랜 세월만 있으면 좋다

 

묵은 흔적을

살점처럼 지워내고 걷어내

마침내 드러낸 제 뼈

 

닳고 닳은 속살 무늬 조각

칼을 대고 힘주는 오늘의 조각

사무쳐 잊지 않기 위한 글 한 조각

 

어느 집 소반, 궤짝, 서안

새기고 새겨진 세월

거기에 또다시 시간을 넣는다

 

 


 

그들은 속솜

 

 

4월이 열리는 그날

총소리 두어 방

탕 탕

 

무엇 때문인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은 뛰었다

 

생각 없이

총소리에서 멀리만

 

그러다 숨어 생각한 게

낮에는 바다로, 밤에는 산으로

 

낮에는 해 신에게 밤에는 달 신에게

그렇듯 그들은 귀의했다

 

몇 밤이 지나자

왜 산으로 갔냐며, ‘

왜 바다로 갔냐며, ‘

 

이레 화륵 저레 화륵*

이 궤에 곱앙 속솜

저 곶디 곱앙 속솜

 

지금도

어느 좁짝흔 궤 어느 빌레 곶디 곱아서

그들은 속솜

 

검은 돌 하얀 글로 새겨진

봉개동 237-2번지*에서도

그들은 속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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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어 풀이>

 

전략

*이리저리 바삐 왔다갔다

이 바위굴에 숨어서 입 다물고

저 숲속에 숨어서 입 다물고

지금도

어느 좁은 굴 어느 돌무지 숲속에 숨어서

그들은 입 다물고

후략

*봉개동 237-2번지 : 43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 기념공원인 제주 43 평화 공원이 있는 곳.

 

 


 

나를, 묻는다

 

 

삶의 회한이

함께

번져가는

저물녘 하늘

 

날개가 퇴화하고

대신

두터워진 발바닥으로

겨우 땅을 짚고선 채

 

초가들이 조개들처럼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옛 마을을

눈에 담아 묻는다, 나를

 

 

 

 

금강산, 발자국 둘을 거기 두고

 

 

1

비와 바람,

끊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깎여 만들어진 일만 이천 봉, 끝 봉우리 구선봉

바둑 두는 신선은 바둑판을 버려두고 영랑호에나 가 있는가

목란다리 양지다리 금수다리 만경다리 흔들다리 건너 관폭정

얼어 굳은 구룡폭포의 흐르던 물은

어디로 숨죽여 있는가

내리지 못해 하늘로 솟았는가

길 바꿔 상팔담에 오르니

눈에 들어오는 봉봉마다

날렵한 협객의 감추어진 단검을 꽂아

하늘을 찌를 듯 솟았지만

매양 상처가 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푸르게 우거진 숲과 언덕들이었다

품에 안긴 나그네의 깊은 탄식이었다

 

 

 

2

제 모습 드러내지 않으려 숨은 골처럼

들어 마신 한숨은

아름다움하고 상관없이, 불타올라 식힐 곳을 찾아

해금강에 이미 마음은 닿아 있는데

돌아보고 돌아보고 돌아보고

삼 일을 쉬지 못해 흉내 내어

세 번을 눈 떠 다시 보니 삼일포인 걸

모두 얼어버린 금강산하,

모두 굳어버린 삼일포

그 속의 자태를 그 뉘가 알까마는

그래도 나그네의 입은 닫히지 않고

하염없이 탄성만 나온다

안경 끼지 않은 병사를 뒤로 하고

안경 낀 초병의 모습을 보니

이제 남측출입사무소 땅

뭘 가지고 왔냐고 물으면

나는 단지 얼마 없어 없어질 눈 위에

찍힌 발자국 둘을 거기 두고 왔다고 대답하리라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