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겨울호의 시(4)

김창집1 2025. 2. 5. 00:03

 

 

없는 마음 서안나

 

 

밤은 어디까지 마음일까요

나는 밤을 오래 생각한다

무언가에 심취하는 일은 사랑과 같아

간 허파 심장 갈비뼈 순서로 아프다

 

밤에 쓴 메모는 진실일까

밤에 쓴 메모를 아침에 지운다

밤은 휘발성인가

 

누군가 밤의 창문을 모두 훔쳐 간다

제멋대로 지나가는 것들마저 아름답다

약하고 아픈 것들은

수분이 많은 영혼을 끌고 다닌다

그래서 밤은 설탕 성분이 1:3 많고 고장이 잘 난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밤은 프로파간다처럼 모자를 쓰고

버려진 개와 고양이와 실패한 공원을 키운다

당신과 나와 실패한 것들은

왜 모두 밤에 포함되는가

공원의 밤은 왜 엔진처럼 시끄러운가

 

이어폰을 끼면 밤이 밀봉된다

유통기한이 길어진다

 

연결부위가 단단하다 밤은, 가끔 달아난다

 

 


 

한락산가 양영길

 

 

설문대 할마님 만들어준 한락산을 올라보세

삼승할망 점지해 준 이내 몸으로 올라보세

동으로 성산 일출봉 아침해 ᄀᆞᇀ이 가고

서펜 끝 수월봉에 지다만 ᄃᆞᆯ 걸려신니

신선 놀던 백록담에 물이 ᄀᆞ득 ᄇᆞ름 ᄀᆞ득

 

탐라국 열어주신 세 을나님* 잘 이신가

진시황 ᄎᆞᆽ던 불로초는 어디쯤에 숨어신고

오백장군 울음 울어 철쭉꽃 더욱 붉고

도노미오름에는 애기 봉황 앉아 논다

 

우리 ᄌᆞᆷ녀 ᄉᆞᆯ펴 주고 바당 풍년 지켜주는

영등할망 그 니와기** 오색으로 춤을 추고

서귀포 외돌개 장군처럼 과짝 서면

용연 요픠 용두암 불을 뿜듯 고개 드네

 

검은오름 새별오름 정방폭포 지삿개 그 어딘고

용천동굴 빌레못굴 만장굴은 또 어딘고

돌하르방 매조제기*** ᄉᆞᆯ펴보고 ᄎᆞᆽ아보세

오를 오름은 삼백예순 걸을 올레는 하영하영

야홍 야아홍 이야홍 타령ᄒᆞ멍

ᄀᆞᇀ이 걸엉 뎅겨 보게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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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나 : 탐라국 건국신화(삼성신화)의 세 주인공

**니와기, 이와기 : 이야기

***매조제기 : 방사탑

 

 


 

세상의 경계 - 오광석

 

 

홀로 지하철 승강장에 서는 건

나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거

스크린도어는 닫힌 세상의 문

너머로 보이는 롱코트의 여인

세상과 세상을 갈라놓은 철도

나의 세상은 오른쪽으로 가고

저 여인의 세상은 왼쪽으로 간다

열차가 도착하고

차창 너머 나를 바라보는 여인

스크린도어를 열고

저쪽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바다를 등진 시골역 앞

작은 시가지가 보이는 찻집

나른하게 흐르는 시간들 속에

수줍게 마주 보고 있을까

도작을 알리는 역무원 소리

활짝 열리는 스크린도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치는 사람들

단절된 채 멀어지는 세상

세상의 경계에 선 열차를 탄다

 

 


 

성읍 안할망 오세진

 

 

물구룸 먹구룸 녹여 멩근

꺼먹돌

 

성 안데레 ᄂᆞᆯ아드는 ᄇᆞᄅᆞᆷ도

먹돌날에 베어 피가 ᄆᆞᆽ엄신가

 

무자(戊子) 섣달 보름

대낭 가끈 ᄇᆞᄅᆞᆷ소리

 

옥비녀 닮아나신 낭게서

설흔 요ᄃᆞᆸ 봉지 지게 ᄒᆞ난

 

낳는 날은 산 ᄌᆞ손덜

생산(生産)을 ᄎᆞ지ᄒᆞ곡

 

죽은 날은 죽은 ᄌᆞ손덜

물고(物故)를 ᄎᆞ지ᄒᆞ영

 

ᄌᆞ손덜 그늘루는

수덕 좋고 영급(靈驗)ᄒᆞ신 하르마님아

 

신칼 놉이 드러난에

ᄌᆞ부다리 씰어 덕거줍서

 

이 ᄌᆞ손덜 열시왕(十王) 압데레 질치건

청나부 몸으로 벡나부 몸으로 환싱(還生)시껴 줍서

 

 


 

애수 장이지

 

 

도쿄 릿쿄대학은

일제 말기

운동주가 다닌 학교

그 도서관에는 언덕 위에 묻어버린 이름

윤동주의 명패를 붙인 의자가 있어서

후인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무성한 풀냄새 같은 것을 맡기도 한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윤동주는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고

울면서 이를 갈면서

녹 묻은 거울을 닦고 닦았다

 

2024년 서울

식민지 시대 우리 선조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노동부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말했지만

 

노동해방문학 창간호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그의 웃는 사진이 실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조직화와 의식화를

그는 말했지만

 

살을 저미고 뼈에 새긴

이름 같은 것이

이 암울한 신식민지의 언덕에 남아 있는가

 

 

                   *계간 제주작가2024년 가을호(통권 제8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