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2)

김창집1 2025. 2. 6. 01:31

 

 

 

억새

 

 

서귀포로 가는 횡단도로를 지나다

일부러 길 안쪽에 차를 세웠다

 

덤불을 헤치며 더 걷고 걸어

아주 좁은 숲속 길에 들어섰다

어린 억새들이 촘촘히 모여

몸을 흔드는 연습이 한창이었다

 

차가운 갈색 바람이 불었지만

가을의 끝을 안타까워하며

겨울의 등장을 저지하려는

안간힘과는 거리가 밀었다

 

나그네에게 마지못해 건네는

메마른 수인사는 더욱더 아니었다

 

서운하기는커녕 오히려 새 계절을

만나는 기쁨의 몸짓임이 분명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풀벌레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라수목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사이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것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 살펴보아도

오후의 푸른 하늘뿐이다

바람이 지나갈 땐 왁자한

까마귀 소리가 여음을 남기고

꽃들은 하얗게 웃는 숲으로

속삭이며, 비끼며 떨어진다

수백 그루의 다른 나무들은

은밀하게 서로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하루 종일 바라본다

오늘의 날씨를 알리는 새들이

수목원을 쉬지 않고 서성일 무렵엔

땅을 기어 다니는 미물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점차 내려앉는 공중을 걸어 다닌다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했듯이

 

 


 

바람 1

    -바람의 속성

 

 

바람이 불기 시작한 뒤에야

구겨진 내 얼굴의 미세한 감각이

평상의 수준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꽃들도 일어서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잘 들린다

 

바람의 방향은 계절마다 다르다

정작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늘 다르지 않은 바람의 속성이다

 

바람이 거느리고 있는 것들 또한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에겐 특별하다

이런 곳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바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지난해 겨우내 불었던 바람이

올해도 이 마을에 다시 찾아와

소명을 수행하는 것처럼 불고 있다

앞으론 절대 소멸하지 않을 태세로

 

 


 

바람 2

    -바람과 길

 

 

곧은길에서는 곧은 모양으로

굽은 길에서는 굽은 모양으로 지나간다

 

바람이 길을 거스른 적은 드물지만

길이 바람을 외면한 적은 많다

 

길이 세상의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면

바람은 온전하게 길을 지나갈 수가 없다

길이 막히는 경우는 이럴 때 생긴다

 

길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그대로 두면

바람은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바람은 들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바람과 길의 운명적인 공생을, 사멸을

부인할 사람은 세상에 아마 없으리라

 

바람이 일시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사람들은

세상의 표면에서 드물게 한 번 나타난

바람과 길의 충돌일 것으로 짐작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사정을 잘 알고 나면

 

바람과 길이 서로를 끝까지 증오하면서

공존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바람 3

    -바람의 행로

 

 

얼핏, 바람은 청명한 가을 밭 모서리

돌무더기 틈에서 불어온 듯하다

 

돌무더기가 만들어낸 바람이든

평평한 땅이 세워 놓은 바람이든

결국 우리에게는 바람만이 남는다

 

바람이 홀연 사라지는 경우를

미리 대비할 필요는 전혀 없으리라

바람은 다른 바람을 일으킬 터이므로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가슴속으로

고난의 바람이 불시에 찾아왔다면

바람과 우리는 이미 친숙한 사이다

 

바람의 본질을 잘 알고 싶은 사람은

먼저 바람의 행로를 파악해야 한다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황금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