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10)
♧ 단골집이 사라졌다
묵은 게
켜켜이 쌓인 밥집, 주인 할머니
주문이 필요 없는 밥집, 주인 할머니
가져다 놓은 밥상에는
잊었던 계절이 있었고
지금 맛있는 게 뭔지
가장 풍요한 게 뭔지 알게 한다
덤으로 가정사의 위안까지 온다
‘큰애가 딸이지, 이제 큰딸은 몇 학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는디’
깨끗하게 정돈된
메뉴판이 있는 작은 식당, 주인 아주머니
주문에 대답하고 요구 사항도 말하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
환대의 미소만으로도 마음이 데워지는 곳
사람과 사람으로 정겨운 곳
그냥 편안하고 편안해지는 곳이다
가끔은 상담사가 되곤 한다
‘우리 작은놈이 사고 쳤나봐, 학교에서 오래’
상담료처럼 내뱉는 말
‘외상 달아 놓으세요’
‘어서 오세요’ 대신
미주하는 키오스크 카페
커다란 기계에 대답만을 찍는 식당
디지털 문맹 여부를 판정하는 심판관 앞에서
주문부터 결제까지 실수 없이
정해진 질문에 대답만 찍으란다
메뉴는 있는데 없다
결국 뒤통수가 오싹해 물러선다
어쩔까, 질문하지 못 하는
말이 사라진 곳, 손가락만 있는 곳
♧ 또 하나의 잔상
-탑바리 바당*
술 마시고
고산 동산에 서서
탑바리 바당을 보면
수많은 별들이 상으로 맺혔습니다
아주 큰 별들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자며 한잔을 더 했지요
별만큼 큰 잔에 별을 넣어서 마셨지요
가슴속으로 별이 내려앉았고
별 따라 꿈도 들어왔습니다
탑바리 바당에는
한칫배 집어등이 하늘에서 토해냅니다.
별처럼 꿈이 생겼습니다
탑바리
바당을 팔아 땅이 생겼습니다
찬란한 등불 걸어 별을 팔아버렸습니다
횟집 젊은 아낙네의 호객 소리만 넘쳐흐릅니다
바다 위를 걷듯, 나는
눈
못
뜬
채
사월의 그것처럼 매몰되어
별과 같이 꿈도 매립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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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바리 바당 : 제주시 앞바다를 1986년 범양건설에서 매립하기 전까지 바다의 속칭.
♧ 반딧불이
제 어릴 적
밝은 것 싫어하고
우렁 다슬기 뱃속에 채우며
땅 속으로 들어간 그 놈
살생의 회한이었을까
소신(燒身)의 꿈을 꾸었을까
이 밤도 세상 밖 성충들 찾아
꽁지에 업보 달고 이리저리 날다가
어느 신선 뒤따르려
이슬만 먹으며 십여 일
그 밝은 광배(光背)
세상에 드리우고 하늘로 오르다
♧ 국수
이 세상 나올 때
대나무 막대기에 다소곳 걸려
수줍게 한들거리며 가지런하던 너
어느 웃음 많은 집 밥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너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고 이 할이 햇볕
가지런함만 지킨 채
가루 냄새 풀풀 날리며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너
이제 흐르는
세월이라는 물을 만나
도란도란 따뜻한 이야기 감싸 품으며
다시 부드럽고 넉넉 함을 양식으로 나눠주고 싶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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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주의 「자화상」 일부를 원용함•
♧ 라면
그 꼬불꼬불 구부러진 성깔을
교화하려
화탕지옥으로 보냈다
4분 30초의 권장 시간이
지나도
그 성깔은 변하지 않았다
숨도 못 쉬게
쇠말뚝으로 누르고 뚜껑을 닫아도
제 몸이 부르틀지언정 버티어 낸다
값싸다고 우습게보지 마라
이 세상
이만한 놈이 또 어니 있으랴
마지막까지 국수가 아니기를 고집하며
제 모습 지키려는 면발
성깔의 컵라면, 지존의 봉지라면
*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 (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