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2024 겨울호의 시(5)
♧ 소녀가 소녀에게 – 홍미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벚꽃잎이 날아왔어요
상기 된 얼굴은 꽃잎
꽃잎 한 장 폰케이스에서 소중히 꺼내며
어린 소녀는 말한다
“첫사랑이 이루어진데요”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던 그 마음
녹아 버린 첫눈!
주위를 맴돌던 그 아이
날개를 접고 끝장낸 건
신발장에 오래 둔 까만 구두
친구의 발 크기에 딱 맞았다
소녀 꽃잎을 생각한다
♧ 짝짝이 눈 – 현경희
오늘 자기의 왼쪽 눈은 살짝 반달
기분 좋아 살짝 쳐진 반달눈썹
화날 때면 부풀어 올라 두툼해진 애교살
그대의 눈 모양은 그날 감정의 바로미터
그런 짝짝이 눈이 불만인 당신
난 말야
짝짝이 눈이어도
어제 뜬 초승달처럼
아래로 처져 있다면
진짜 진짜 좋을 것 같아
아… 참…
그거 알아?
사람 눈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다 짝짝이라는 거…
♧ 기타 치는 밤 – 김영란
무리에 끼지 못한 바깥의 그것들
너희는 남이라고 우리와 다르다고
이름을 불러주는 이 아무도 없었지
불온한 것들은 나날이 불안했어
한곳에 몰아넣고 발로 차지 말라며
기타는 기타를 위해 울어주고 싶었겠지
이름 없는 새라고 이름 없는 꽃이라고
이름 없는 것들의 이름이 되어주는
기타여 너를 위해서 오늘은 내가 울게
♧ 시가 온다는 것은 – 오영호
천길 바닷속이나 너럭바위에 숨어 있던
시어를 물고 나온 벌 나비 날아오듯
당신이 온다는 것은 생기 돋는 일이지요
지독한 그리움도 푸른 별빛으로
은유의 달빛으로 외로움도 채색될 때
포장 푼 나의 독백이 샘물처럼 솟네요
♧ 한라구절초 - 이애자
딸 다섯에 아들 셋을 낳으셨던 어머니가
부인병 고친다며 막내 낳던 어머니가
간신히 죽다 살아난 구구절절 어머니가
오일장 됫박 쌀로 해 그물던 어머니가
새벽녘 밥장사로 짓무르던 어머니가
벽에 쓴 상형문자가 외상장부인 어머니가
스무 해 투석 받다 눈 감으신 어머니가
피고지고피고지고 세월너머 어머니가
불현듯 그리워지는 구구절절 어머니가
♧ 물수제비 - 조한일
바닷가 자갈밭에
장독 파편 널려 있네
메주를 금괴처럼 보듬으며 장 담글 때
간장 내 풍기는 밥상 간이 배던
저녁 한끼
누룩곰팡이 몸 풀던
풍만한 항아리 속,
엉겨 붙은 시간에 입 다시며 툭 던진다
짭짤한 바닷속에서 간장 뜨는
물수제비
♧ 아주 작은 사랑 이야기 – 한희정
함박눈 작은 손들
서로 포개 따뜻하다
돌담 위
빈 쭉정이
뾰족한 침엽에도
잡은 손
떨지 말라며
나붓나붓 덮는다
*계간 제주작가 2024년 겨울(통권 제8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