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11)
♧ 떨림․1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야
‘와’라는 탄성이 남몰래 튀어나오듯이
박물관에 있는 것보다
보잘것없는 구렁에, 볼품없는 산정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보았을 때 가슴
이 뛴다
있어야 할 그 때 있어야
‘아’라는 언어의 부족함을 토해내듯이
철없이 피어대는 꽃들보다
계절 따라 피는 것들에게서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본다
더욱이
그 때 그 곳이라면 어떨까
‘훅’ 들어오는
눈 감은 생각만으로도 황홀한 흔들림이 덜컹거린다
♧ 떨림․2
지난해 봄 갔던 곳
올 봄에 들렀더니
그 사이 무척이나 변했다, 여기저기
10년 전 여름에 갔던 곳
찾아갔더니
강산이 변한 것처럼 달라졌다, 몇 곳만 남겨두고
20년 전 가을에 갔던 곳
콕 찍어 갔더니
이제는 아예 그 자취도 사라졌다, 새로운 곳처럼
30년 후 겨울에
별생각 없이 지나치다
마주친 곳, ‘아’ 그대로네
그 때는 돌아올 수 없지만
그대로인 그런 곳에서
서성이는 나, 생각만으로도 황홀한 흔들림이 덜컹거린다
♧ 비양*, 그곳은
바람을 가르고
파도가 모이는 섬, 비양
코끼리 바위 등판은 한여름도
눈 덮인 만년설, 새들과의 동거
지나치는 마을의 돌담은
거친 파도를 이겨낸 모습 그대로, 둥글다
썰물 때만 그 길을 내어주는 노란 등대는
비양의 속살 그대로, 수줍다
나가기 싫은 듯 머무는 바다
펄랑못 염습지, 하늘과의 동거
비양도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대륙, 제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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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양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挾才里)에 딸린 섬이자 오름.
♧ 수선화
“제주대학병원 3병동 ×××호실”
형수가 병원에 입원을 했단다
“3병동 ×××호실이 어디죠”
안내인의 얼굴이 금세 굳어진다
“3층……, 암-ㅁ 병도-옹……”
순간 나에게 떠오르는 건 어머니였다
그리고 수선화 꽃이었다
수선화 향기였다 아니 수선화 냄새가 맞다
암 투병의 진한 기운이 가득했을 때
한 쪽 유리컵 가득 꽂혀진 수선화 무더기, 수선화 냄새
암 덩어리의 썩은 물을 토해 역함이 눌러 붙은
방 안 구석에 수선화는 그렇게 자신을 내보이고 있었다
나는 나를 탄생시킨 썩어가는 몸을 멀리하지만
나의 모든 감각기관이 부정되기를 바라지만
동물적 본능도 없고 인간적 정리도 없는
무더기 수선화는 향기를 피웠다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아들을 숨 쉬게 했다
그런 수선화가 오늘 내 눈 앞에 다시 선다
내 마음속 멍에가 퉁탕거리며 명하니 선다
♧ 양엣간*
사각진 내 밥상에 놓인 니
달빛 기다리는 울담 밑에서
낙수 떨어지는 처마 밑에서
제 본분 다하려
치장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뿌리 에서 솟는 꽃줄기
그 순박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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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엣간 : 양에(표준어는 양하)의 땅속줄기에서 솟아나는 죽순 비슷한 꽃이삭의 제주어로, 빗물 등이 땅을 파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나 처마 밑에 심었음.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 (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