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2024 겨울호의 시(7)
♧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목록 – 김대용
1. 오래된 여행을 다시 되새겼다 낡은 배낭과 신발도 세탁기에
넣었다 끼는 새 신발이 익숙하기도 전 그때 여행은 끝이 났다
다시 사막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적어둔다
멀리서 온 여행자를 존중해 맑은 물과 대추야자를 건네주며
환대에 대한 고마움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2. 용서해 주마 무지와 노욕을 무뢰함도 그리고 잘 모르면서
열심히 해버린 결과까지도. 내 탓이다. 신중하지 못한 순수였다
그래도 떠날 준비를 한다. 낡은 배당 옆구리 포켓에 남아있는
어느 낯선 도시의 기차표를 다시 들고 너무나 깊은 잠을 밀어내며
바람에 실려 온 또 다른 저녁 무렵 돌아가는 해와 함께
다시 사막의 품으로 숯검정으로 얼룩진 주전자
커피를 볶고 갈고 가시나무 가지로 불 피운 어느 해
야크 털 이불속에 벌거벗은 알몸으로
3. 마지막 희망은 하나 있는 자식의 연인이다
산과 들과 바다를 좋아하고 자전거 타고 낚시도 하고
비오는 날 주말에는 하루 종일 기타 곡 듣고
강아지 좋아하고 금붕어도 기르고
좋아하는 화분 기르고 벌레 먹은 사과도 오려 먹고
찬밥이나 남은 반찬으로 비비거나 볶아먹고
좋아하는 와인 이름도 하나있고 과식하면 후회하고
그래서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걷고 추억의 낡은 짐들은
아름다운 가게에 주고 작은 선물도 정말 고마워 할 줄 알고
혹시 산호초 우거진 바다에서는 하루 종일 헤집고
다녀도 지치지 않아요 하는 아이
4. 꽃은 피고지고 바람이 분다 촉촉한 물기 머문 차가운 바람
크게 숨 한번 쉬고 나면 힘들어 올라 온 이마의 땀은 지워지고
깊은 잠속에도 투명한 하늘 아래 나뭇잎들이 환호한다
언제나 배낭 속에 담긴 치졸한 내 청춘이 고개 들었다
낯선 거리에서 만나는 거리의 꽃들과 문신으로 얼룩진
마스크 속의 눈빛들이 가로등 아래 풀잎이 자라고
그 둘레에 비둘기들이 무엇인가 복면의 시대 먼지 뒤집어 쓴 들풀들
슬픔의 힘 되어 분노가 힘 되어 만개했던 거리의 벚꽃 무리들이
밤새 바람맞고 쓰러지고 가난해서 웃는 유곽에서 노래를 부르는
낡은 그림자 껴안고 웃으면서 그러나 며칠 행복했다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가려 하는 지 촛불들아
♧ 도깨비바늘 없애기 – 김병택
주위에 무성하게 자란 도깨비바늘을
단번에 베어내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뻗치던 잎들을 잘라내고
아예 성장의 원천을 깨끗이 없앴다
진흙 덩어리에 묻힌 뿌리도 파냈다
여기저기에 침투하는 햇빛을 막았다
시간의 순서를 일부러 뒤바꿔 놓았다
오래된 성장 내력조차 모조리 지웠다
무리한 공격으로 억울하게 쓰러진
다른 가지들의 절규는 잠시 잊었다
주위의 도깨비바늘을 뽑는 것은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가능했다
가을이 오자, 내게 다가왔다
이젠, 주위의 사연들을 자주 만나도
아무 일 없겠다는 청량한 생각이
♧ 상사화 꽃대 - 김순선
크레파스를 잡은 아이 손이
무더기로
연둣빛 빗금을 치고 있다
꽃대는
느낌표로 마구마구 일어선다
둥근 실타래를 풀어올리며
부끄러운 마음이
고개를 내밀기까지
햇빛은
향기를 물어다 주었다
바람은
우편 배당을 메고 한라산을 넘어
장대비를 몰고온다
벌써
건너편 꽃대에
하나
둘
우산이 펴진다
♧ 가을하늘에 죄를 씻다 – 김승립
병원 대합실 신문을 보다가
잠시 눈 들었더니
비스듬히 졸고 있던 여인의
하안 허벅지 눈 앞 가득 채운다
아무 잘못 없이 죄스러워
짐짓 눈 돌려 창밖을 보니
호수처럼 시린 가을 하늘이
눈의 죄를 씻어줄 것만 같다
♧ 봄ᄂᆞᄆᆞᆯ - 김항신
꿩마농사 알주게 난시도 알아져라
경ᄒᆞᆫ디 쓴부루켄 미신건지 몰르키여
그건 민들레엔 헴신게
꿩마농은 달래고 난시는 냉이고
가심이 석석ᄒᆞ게 실리우민 꿩마농에
ᄎᆞᆷ지름광 ᄎᆞᆷ깨 논 장물에 보리밥
비빈작 ᄒᆞ영 먹으민 배설 ᄃᆞᆺᄃᆞᆺᄒᆞ게
문짝 ᄂᆞ려 가키여
쓴부루케도 ᄒᆞᆫ놈이역 ᄒᆞᆫ덴 ᄀᆞ람신게
꼿봉오지 베려보라 이추룩 곱들락ᄒᆞ다
*계간 『제주작가』 2024 겨울호(통권9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