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5)
♧ 우물 일화
봄날, 큰비가 쏟아지고 난 뒤에 어둠이 일렁이는 시골 마을길을 걷다가 녹색 플라스틱 지붕 아래 있는 우물을 보았다 가슴 언저리까지 밀려오는 반가운 마음에, 나는 곧장 우물 앞으로 다가갔고, 우물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지나치게 숙이다가 그만 안경을 빠트리고 말았다 안경은 내게 항상 사물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 주는, 오랜 벗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사다리 계단을 이용해 우물 안으로 내려가려고 했을 때, 나로 하여금 신경을 쓰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다리의 부실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른의 몸무게를 견디기에는 아슬아슬한 사다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다리의 계단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나는 우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말 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물 바닥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안경은 수북이 쌓인 해초 위에서 발견되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안경을 끼고 곧장 우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우물 안의 둘레를 감싸고 있는 회색 콘크리트 벽에 검정 페인트로 갈겨 쓴, 젊은 날의 우울을 호소하는 문장들이 내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우물 안은 우물 밖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곳으로 보였고, 모든 소리는 잘 들렸다 게다가, 꽃의 향기는 정원에 피는 그것보다 더 진했다 그때, 내 머리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도, 간혹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김없이 우물 안에서 겪었던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 귀환하는 기억
휴일 아침, 집의 창문을 열었다
고여 있던 한 무더기의 공기 입자들은
술 취한 사람의 갈지자걸음으로
빠져나갈 채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부처님 말씀이 옛날에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귀에 들어왔지만
요즘에는 길게 머리를 수시로 풀며
기억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억의 분량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몇 개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할 것 같았다
창문을 통해 사라진 기억들 중에는
방구석에 쌓인 책들 틈에 끼어서
거멓게 변한 것들도 더러 있었다
유년시절은 밋밋해서 볼품이 없었고
청년시절은 한 마디로 불투명했다
기상이 악화되어 창문이 흔들렸고
이어, 굵은 빗방울이 소리치며 내렸다
창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웬걸,
사라졌던 기억들이 유리창 주위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 익사한 꿈들
넓은 바다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여러 색깔의 꿈들을 보았다
구원의 밧줄을 던지려고 해도
매번 실패를 부추기는 일상의 시간이
매듭을 잘랐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바다에는 또한 아주 오래전에
어선들의 일으키는 물결 따라
노란 집어등 불빛이 흔들릴 때
깊이 묻힌 꿈들도 있을 터이지만
오늘, 투망으로 건져 올린 것은
오랜 세월 동안 희망을 붙잡으려
거리를 떠돌다가 익사한 꿈들이었다
마치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실패한
도박사들의 욕망을 아주 많이 닮은
♧ 만선滿船
수평선 근처의 어선 한 척이
부두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란 불빛이 어선 주위를 비추었다
어선은 닻을 내릴 준비로 부산했다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른 청년이
갑판에 나타나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이를 본 젊은 여자가 앞으로 나가면서
보라색 손수건을 황급히 흔들었다
만선滿船의 뱃전에 부딪히는 물결은
연인들의 대화를 많이 닮았다
경쾌하게 출렁이다가 까닭 없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부두 구석에 묵묵히 서 있는 가로등도
부두의 들뜨고 불규칙한 소음을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 아득한 상실
겨울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 여기저기 떠돌던 탁한 소리들이
초가집 등불 앞에 기립한 채로 모여들었다
심심할 땐, 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일부러 가사를 바꾼 렛잇비를
낡은 집 뒤뜰에서 여러 번 불렀다
억지로 들판을 건너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매일 바라보는 산은 어느 시간에도
성직자처럼 낮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무에 앉은 매미들의 합창소리와
폭포처럼 내리는 화려한 햇살이 서두르며
바닷속으로 우르르 뛰어들곤 했다
메마른 산등성이를 달리던 노루가
아득한 공중을 향해 뛰어올랐다
요즈음과 판이했던 시대의 이념과
금속성의 연설은 언제나 정다웠다
이젠, 한 톨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옛날의 모든 것은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 (황금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