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 동보 김길웅 '여든두 번째 계단에 서다'
♧ 권두시
늦깎이지만 글은 내 인생이야.
방황에 닻을 내린 건 첫 수필집 ‘내 마음 속의 부처님’이었어. 무애(無碍)의 뜰을 거닐었지. ‘삶의 뒤안에 내리는 햇살’에서 안정을 찾는 듯하더니 ‘느티나무가 켜는 겨울 노래에서’ 한때 곡쟁이처럼 울었어. ‘떠난 혹은 떠난 것들 속의 나’로 이별을 연습하며 ‘검정에서 더는 없다’에선 현란한 색 뒤 남는 담백한 빛―흑과 백을 터득했고, ‘모색 속으로’에서 나이의 무게로 ‘마음자리’에서 흐트러진 삶의 대오를 정돈해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력’과 ‘내려놓다’로 다디단 수필의 서정에 감루를 삼켰지.
결핍에서 ‘여백’과 만나 시작한 내 시,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에서 치기로 어머니 사랑을 재음미 했어. ‘긍정의 한 줄’을 만지작거리다 내 시의 앳된 화자는 ‘틈’ 속에서 서로 화답하면서 좀 삐딱하게 해보자고 ‘허공을 만지며 고등어를 굽다’로 변용해 속울음으로 나를 뒤흔들었던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의 명징한 회상, ‘텅 빈 부재’에서 존재론에 침몰했다가 ‘둥글다’로 원만 구족의 경계를 바라며 다다른 고즈넉한 평화, ‘너울 뒤, 바다 고요’로 섬의 포구에 접안한 것이거든.
수필 집 아홉, 시집 아홉, 스물에 안 차 미흡하지만, 만조에 남실거리는 열여덟 주낙배로 내 포구는 만선의 때를 갈구해.
짙푸른 바다를 신뢰하는 나는, 바람 앞에도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투망으로 머잖아, 파닥거리는 날 것의 언어를 뜰채로 떠 가며 환호할 거야.
혼자의 시간.
(2023. 5. 30.)
♧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
가뭇없이 지워졌다
다시 살아나는 기억 하나
눈을 빛내고 있다
마주 한 물푸레나무 이파리만한
아주 조막만한
유년의 기억 한 쪼가리
배곯아 긴긴 겨울밤을 어린아이
군침 삼키는 서슬에
돌아눕던 어머니
당신의 흔적은 아무 데도 없었는데
이순의 문턱을 넘어선 날
내 앞 허공에
길인 듯 강물인 듯 허공인 듯
산인 듯 하늘인 듯
당신이 만지다 간 흔적은
세상없이 아름다워라
바람이 지우다
지우다 아직도 남은.
*東甫 김길웅 등단 30년 회고 『여든두 번째 계단에 서다』 (정은출판, 2023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