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5)
♧ 별은 빛나건만
서울 갔다 온 날
집에 안 들리고
서귀포예술의전당 음악회에 가려
제주시청 앞 281번 버스 타니
작고 여위고 해맑은
서른 좀 넘었음직한
운전기사
다시 본다
한 시간 걸려 한라산 넘어
남극 수성壽星 보인다는
남성마을 내릴 때
뒤돌아
한 번 더 본다
젊은 기사여,
마흔 쉰 예순 되어도
그 눈빛 그대로이길!
♧ 235년 전
눈 감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듣는다
전날 완성해
한 번도 연습 못한 곡
피아노 치며
지휘하는 그
기립박수
눈 뜨니
창밖
비자나무
새들
살아있다!
♧ 배경
해남 전국 시낭송 대회 때 심사위원 중 좀 젊은 시인이 오세영 원로시인으로 바뀌어졌는데, 김구슬 시인 대신 위원장 맡는 걸 고사하여 두 번째 자리에 내내 앉아 계신 걸 보았다.
근래 선생이 발표한 시를 보니 어떤 자리든 늘 중심이나 앞에 있었지 뒤가 된 적이 없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 곡우穀雨 즈음에
오동나무 잎 솔솔 날고
종달새 파드득 피어나고
무지개 댕댕 울리는
청명淸明도 지나
세 살 아기 배꽃 빛 손바닥
살 올라오듯
뽀글뽀글 솟아나는
고로쇠나무같이
치잣빛 스커트
긴 다리
날날날
계단 오르는 단조음 여자
눈 속같이
아직 날지 못하는
어린 동박새
매화나무, 살 비벼 등어리 되어 주는
어미 새같이
어릴 적 꿈꾸던,
바다 위아래
휘저어 다니는,
침몰은 차마 꿈도 없던
그런 배,
비추는 먼 불빛같이
진달래 자르르 웃고
나비 하얗게 뜨고
황사 지레 가 버린
곡우 즈음에
♧ 허구헌 날
한라산 남쪽
위미리에 집 마련
용인서 자주
십 년 뜰 가꾸는
수필가 손광성 선생
육이오 때 누님과 내려와
미수米壽 가까운
잔디밭 잡초 매는 거
도와주려
산 북쪽서
아침에 간 아내에게
“나 선생은 뭐하고 있어?”
“한라산만
바라보고 있어요”
나부상裸婦像이
쓰윽 웃었다
*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 (서정시학,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