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조' 2023년 제32호의 시(2)
♧ 목간木簡 - 강영임
천지사방 아득한 돌길 걷다 돌이 된 것처럼
햇빛도 양분도 없이 침묵만 있는 곳에서
낯익은 당신이 보낸 그리움을 받아듭니다
♧ 거울을 보다가 - 강상돈
아침부터 왜 이리 분주한지 정말 몰라
남의 속도 모르면서 흉내까지 내다니
가쁜 숨 몰아쉬면서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
풀려가는 실타래를 한없이 쳐다보다
기분이 상할까봐 웃음 한번 지어보고
거울 속 또 다른 날 향해 한 남자가 서 있다
매일 아침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여기도 저기도 가지 못할 이력들이
출근길 머리 위에서 하얀 꽃이 맺힌다
♧ 비움 - 강애심
인체 화석에서 발견된 그 결핵이
끈질긴 전유물로
내 몸을 훑고 갔다
넘치는 세상의 곳간
비워야 산다는 듯
♧ 장다리꽃 - 강영미
수평의 잣대 들고 나를 재지 마세요
평대리 갯동산 밑 수더분한 바다에도
내 속 다 보일 것 같아 주춤 물러서게 돼요
나잇값 자릿값 얼굴값쯤 하는 일이
어린 척 모르는 척 모자란 척일까요?
바람에 날아온 날도 파도 소리 높았어요
평생을 산다 해도 길들지 않을 하루
혼자 피고 진다 해도 많이 섧진 않아요
길 위의 여자라구요, 조금 말이 많아요
♧ 겨울 구절초 – 고성기
눈 올 무렵 숲 그늘에
수줍게 핀 구절초
보는 이 없어도 피어
마른 꽃이 되었구나
꽃들아
수고 많았다
내가 미리 보러 올 걸
살며시 향을 맡으면
가까이 다가와서
보는 이 없어도 피는 꽃이
세상 어디 나뿐이랴
귓가에
내려놓고선
바람 따라 가는 꽃
*제주시조시인협회 간 『제주시조』 2023년 제3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