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8)
♧ 거울의 화법
한 달이 멀다하고 서울을 가는 친구
일이나 여행 아니라 휠체어로 오간다
어느 날 한참 동안을 머뭇대다 끊긴 전화
보름쯤 지났을까 뜬금없는 카톡 사진
지하철 스크린도어 게시된 내 시(詩) 몇 줄에
저기압 벙거지모자가 배경으로 앉아 있다
‘뽀샵하려 했는데… 못해서 그냥 보낸다’
굳이 감추려던 민머리 그 마음 알겠다
세상의 그 어떤 고백도
대신하는 거울의 화법
♧ 은행나무 밥집 – 김영순
허기를 모른다면 세상이 재미없다
제주 칼호텔 근처 반세기 비바람 속에
함석집 지붕을 뚫고 기둥이 된 은행나무
그 나무 품은 밥집에선 연애사도 출렁인다
의귀에서 시내로 유학 온 막내삼촌도
저 혼자 말 못할 고백, 단풍처럼 탔었다
여기도 코로나는 비켜가질 않는지
재작년엔 ‘국밥집’ 작년에는 ‘정식집’.
올해엔 또 ‘밥심’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와글바글 발길들 다 어디로 흘렀을까
‘밥심’만으론 못 막은 거저 노란 독촉들
몇 방울 가을비 핑계로 더 환하게 피어난다
♧ 나무는 지금 음악 감상 중이다
누가 왜
그랬는지
따지지 않겠다
퇴근길 가로수에 걸려 있는 CD 한 장
쉿, 조용
나무는 지금 음악 감상 중이다
♧ 하늘 경전
-한곬 현병찬 서실 ‘먹글이 있는 집’에서
서실 천장 붓글씨들 여름밤 별자리 같다
남두육성 견우직녀성 새로 생긴 어머니 무덤
서귀포 남녘 하늘에 꼬리별이 또 진다
어느 문하생이 못다 쓴 고백일까
‘스치면 인연이요 스며들면 사랑이라’
누구의 말씀이신가, 별 스치는 이 밤에
괴발개발 살아온 길, 파지처럼 살아온 길
획 하나 점 하나 놓친 흠들은 흠들끼리
저렇게 어울려 있어
비로소 걸작이 된다
♧ 마타리꽃
오르막이 어렵다면 내리막은 쉬운가
연해주까지 따라온 중고버스 낙서들
한참을 빌빌거리다 기어이 서고 말았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지’
‘설마, 이 땅에서도 빌붙지 못할까’
툭 뱉는 가이드 말이 목에 걸린 가시만 같아
허허벌판 버려져도 뿌리째 흔들려도
내 본질은 야생화, 결코 기죽지 않는다
사랑아, 너도 그처럼 피고 지고 하여라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 (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
* 사진 : 눈이 그린 난초(2023. 12. 17. 사려니숲길에서)